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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여행학교/제3기 세계로 여행학교

[제3기 세계로여행학교 기행문 ③]

진주남중2 박재현

 

 

-사전교육-

 

아무 생각 없이 왔던 여행학교 방학하기 한 달 전쯤 부모님의 권유로 오게 된 여행학교 처음엔 프리스쿨 이니 머니 하면서 귀찮고 낯설었다. 프리스쿨이 시험과 대회, 대회 준비 기간에 걸쳐서 조금 갈 바에 가지 않는 것이 낳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근데 선생님은 최소 2번은 와야 된다고 하셔서 처음과 끝을 가게 댔다.

   

 

-방글라데시-

  

2013. 12. 30 월요일 여행 첫날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여행을 오게 댔다. 오는 중 좁긴 해도 그런대로 잘 도착했다. 김해에 3:20분 쯤 도착해서 5:30분 비행기를 기다리다 5:50분으로 비행기가 연기 댔다. 정말 지루했다. 휴대폰 없이 몇 시간을 기다리니 시간이 정말 길다는 걸 느꼇다. 그런다 4:50분 티캐팅 하고 짐 부치고 나니 다시 6:30분으로 연기 댔다. 그사이 6시에 선생님 폰으로 부모님께 보내는 영상편지를 촬영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6:30 상해 행 비행기가 떳다. 그 지루하고 지루하던 긴 기다림에 비해 걱정 반 설렘 반이었던 비행기에서의 약 2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그러나 우리의 일정은 한 시간의 연기를 시작으로 악순환이 시작 댔다. 상해-쿤밍 비행기는 비행기에서 탄채로 2시간을 멀뚱 멀뚱 기다리다 결국엔 취소되었다. 난 다시 멍하게 뭔 상황인지도 모른 채 형 누나들을 따라 다시 공황에 내렸다. 그렇게 짐을 찾고 있는 중에 은민이 누나의 배낭이 없어진걸 알았다. 중국이라 말도 안통하고 공황도 넓어짐이 어디 갔는지도 모른 채 그대로 짐을 잃어 못 찾는 줄 알았다. 2시간 정도 공황 직원과의 실랑이 끝에 은민이 누나의 배낭을 공황 직원이 찾아왔다. 이때 난 짐표의 중요성을 알았다. 이때까지 짐표는 그냥 비행기 표에 붙어서 있는 같이 버리는 쓰레기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공황 직원은 어디선가 짐표를 가지고 갔다 은민이 누나의 배낭을 들고 왔다. 그리고 다음날 쿤밍 행 비행기를 위해 동방 항공에서 운영하는 호텔에 갔다. 호텔에 도착 후 홀에서 각자 방 배정을 받고 올라갔다. 난 시은이 형 선규 형과 같은 방을 썼다. 자려고 했으나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형들과 같이 라면을 부셔 먹었다. 처음엔 그냥 스프를 찍어 먹는대만 쓰다가 나중엔 시은이형의 아이디어로 스프로 국물을 만들어 먹었다. 진짜 라면 같았다. 생각 이외의 맛이라 놀랬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시은이 형과 나는 침대에 잠시 누워 있다가 쓰러지듯이 잠들었다. 그렇게 약 4시간 정도를 잤다.

 

2013.12.31. 화요일 여행 둘째 날

다음날 일어나 다시 상해 공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해에서 쿤밍 행 비행기 역시 연기가 되었다. 비행기 연기와 취소의 연속으로 이젠 모두가 예상했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자연스러웠다. 그저 우리는 오늘 안에만 다카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열심히 날아 쿤밍 공황에 도착 하였고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다카 행 비행기가 이미 출발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황 직원과의 말과는 다르게 다카 행 비행기가 지금 출발 하오니 다카 행 비행기를 탈 사람은 해당 게이트로 오라는 방송이 나왔다. 희은이 누나가 그 방송을 듣고는 방글라데시 사람들과 같이 공황 직원에게 따지니까 없었던 자리가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출발한 비행기를 타서 다카로 날아갔다. 이때 나는 사람은 말을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우리가 이날 비행기를 못 잡았더라면 우리의 방글라데시에서의 일정의 대부분이 취소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날인 11일 날부터 15일에 있을 선거 때문에 공황에서 못 움직였을 것이라는 것이 현지인들의 말이었다. 3시간을 열심히 날아 다카 공황에 도착하자 방글라데시 모기들과 김종란 선교사님이 우리를 마중 나와 계셨다. 우리는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이끌고 렌트카를 타고 김종란 선교사님이 지으신 ashaloy 학교로 향했다. 우리는 그렇게 일주일간을 ashaloy 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2014.01.01. 수요일 여행 셋째 날

15일이 방글라데시의 선거일이다. 우리는 아쉽게도 방글라데시의 선거 기간에 겹쳐 방글라데시에 방문했다. 방글라데시의 선거는 우리나라와는 상상도 할 수 없게 다르다. 쉽게 선거가 머 어때라고 생각 할 수 있으나 문화적 차이 때문인지 사상의 차이인지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이 나라에서 벌여 지고 있었다. 시위 때문에 교통이 마비되 우리는 움직이지 못하고 Ashaloy school에서 머물렀다. 그렇게 일정과는 다르게 오전을 학교에서 보내고 점심을 먹고 희은이 누나, 시은이 형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전날 오지 못한 짐을 찾으로 다시 삼엄한 경비속의 공항으로 갔다. 나머지 우린 차가 없는 관계로 방글라데시의 릭샤를 탔다. 그렇게 줄을 이어 릭샤를 타고 가고 있었으나 중간에 교차로에서 끊기는 바람에 선규형, 하언이 누나, 도연이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탄 두 대의 릭샤는 방글라데시에서 길을 잃게 된다. 그렇게 20여 분간을 정처 없이 헤매다 겨우 다시 학교에 도착한다. 그렇게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며 우리끼리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 하고 있을 때 공항에 갔던 팀이 돌아왔다. 시위로 인해 공항의 진입조차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로 짐을 갖고 나오는 것 이였다. 짐이 생각보다 많았기에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각각 나눠 짐을 찾아 나오는 중 선물 가방들은 무사히 통과했으나 생각지 못한 책 박스가 세관에서 걸린 것이다. 그 순간 방글라데시 공항 직원의 입에서 나온 반가운 한국어 바로 직원이 한국 귀뚜라미 보일러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렇게 귀뚜라미 보일러아저씨 덕분에 별탈없이 돌아오게 되었다.

 

2014.01.02. 목요일 여행 넷째 날

드디어 본 여정인 영상편지를 전하는 날이다. 원래는 첫째 날에도 전하는 걸로 알고 있었으나 시위로 인한 교통마비 때문에 전하지 못하게 되어 꽤나 아쉬웠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나 싶어 기대되고 설렜다. 그런데 차가 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그러자 슬슬 걱정되기도 하였다. ‘이러다 오늘도 못하면 어쩌지등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김 종란 선교사님 말고 다른 선교사님이 오셨다. 그 뒤로 어제 말했던 상화 형도 같이 왔다 차도 기다리는 겸 상화 형과 서로 인사도 하고 선교사님과 같이 릭샤를 타고 군것질 거리를 사왔다. 그리고 아만 집에 방문했다. 첫 집이라 기대대고 긴장되고 다큐멘터리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러나 우리가 방문한 아만 집은 나의 예상과는 달리 너무 잘 살았다. 너무 잘 사는 바람에 좀 실망이 컸었다. 영상편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usb를 놔두고 오는 실수가 있었지만 그런대로 잘 진행 되었다.

 

2014.01.03. 금요일 여행 다섯째 날

오늘은 박물관을 가기 위해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이동했다. 강가를 따라 가다보니 강가에 모여 사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물이 없어 아무런 정화없이 강물로 씻고 먹고 싸고를 다하는 것을 보았다. 이를 보며 아무렇지 안개 사용되던 물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 아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시간을 달려가는데 모터 소리에 모두가 녹초가 되었다. 처음엔 시끄럽더라도 배타고 지나가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보면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나 계속 만나니 이젠 귀찮은지 다들 그냥 그저 그랬다. 나도 되게 피곤했으나 이런 장면들이 꽤나 재밌었다. 그렇게 힘들게 큰 모터 소리를 참으며 약 3시간을 달려 가였으나 아쉽게도 박물관 개장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보다 모닐씨가 우연히 전의 단채의 보스를 만났다. 그렇게 반갑게 인사하고 사진 찍고 해어졌다. 난 정말 지구가 아닌 지구촌이라는 말이 공감이 갔다. 여기서 앞으로라도 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한테도 잘 해줘야 갰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4.01.04.토요일 여행 여섯째 날

오늘은 모닐씨의 사촌 누나께서 일하는 박물관에 갔다. 방글라데시의 몇 없는 박물관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총을 든 경비 아저씨들이 많이 보였다. 입구에는 금속 탐지기까지 갖췄다. 박물관을 한번 둘러보고 나니 역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박물관에 방글라데시의 역사가 적혀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자신들의 나라의 정치 상황이 어떤지도 모른 채 그저 일로 따라갔다, 절로 따라갔다 하는 것이 참 안타까웠다. 평소 역사를 중요시 하지 않던 나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오는 길에 국회 의사당을 방문 하였다. 다음날이 선거일이라 그런지 평소 꽉 막혀 있다는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보이는 건 차 몇 대와 cng, 릭샤 뿐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2014.01.05. 일요일 여행 일곱 째날

오늘이 바로 방글라데시의 선거날 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선거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듣고 난 되게 놀랬다. 어차피 정해져 있는거 왜 이리 위험한 시위를 하는거지? 라는 의문점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시위도 사실은 일반 시민들이 위에서 돈을 주니까 하는거 라고 하였다. 그 사실을 듣고 정말 아는 것이 힘 이구나라는 생각도 들고 힘이 없으면 안 되는 거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날은 모자멜씨의 사촌 집이 Ashaloy 핚교 근처에 있다는 걸 알고 다는 못 가는 관계로 선규형,희은이누나,하언이누나,나경이만 해서 갔다.

 

2014.01.06. 월요일 여행 여덟째 날

드디어 방글라데시의 마지막 날 태희는 우리가 아쉬운지 자꾸만 언제 다시 오냐며 묻고 매달린다. 누나도 있고 친구들도 있지만 나름 외로웠는지 어리광 부리는걸 보니 약간 안쓰러웠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서바이벌 미션을 하며 태희와 태현이?의 선물을 샀다. 그리고 다카 공항으로 가 네팔행 비행기를 탔다. 네팔에 도착하니 스쿤다 삼촌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한국말을 할 줄 아니 우리는 되게 반가웠다.

 

 

-네팔-

 

2014.01.07.화요일 여행 아홉째 날

카트만두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일어나 수니타씨 집으로 향했다. 5시간을 달려 도착했다. 방글라데시에서 타왔던 차와는 비교도 안 대개 컸었다. 방글라데시에서의 좁은 차안이 익숙해져서 그런가 정말 좋았다. 역시 사람들은 불편을 겪어 봐야 자신의 위치에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나는 이번여행에서 많은걸 느껴 간다. 현재 내가 느끼는 편안함과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 네팔과 별 차이 없던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장하는데 기여한 분들과 나를 위해 주시는 분들께 항상 고마움을 느껴야 된다는 것을 느꼇다. 약 오후 3시쯤 우리는 수니타씨 집에 도착 하였다. 그렇게 주변 동네 사람들과 인사하고 아이들에겐 풍선을 나눠 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수니타씨의 어머니 집에서 홈스테이 하면서 네팔에서의 첫집에 무사히 영상 편지를 전해 주었다. 수니타씨의 어머니께서 영상 촬영 중 많이 우시는걸 보고 혼자 산다는 게 많이 외롭고 힘들다는 걸 느꼈다. 우리는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어머니 집에 태양열 판을 하나 설치 해주었다.

 

2014.01.08.수요일 여행 열 번째 날

하루 더 수니타씨 어머니 댁에서 홈스테이 하는 걸로 하고 우리는 이채빈씨 집과 페러글라이딩을 하러 포카라로 향했다. 거리가 얼마 되지 않기에 1시간 안 되서 포카라에 들어설 수 있었다. 카트만두에서 수니타씨 어머니 댁으로 올땐 몰랐으나 네팔은 우리나라완 달리 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사람이 직접 내려 신고하고 통행료를 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카라 내로 들어갔으나 포카라 내 에서도 꽤나 이동했다. 근데 난 카트만두보다 포카라가 낫다고 느꼈다. 등산객이 많이 와서 그런가 수도 카트만두보다 포카라가 낫다고 느껴졌다. 포카라 시내에 가니 이채빈씨의 오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채빈씨의 집에 가서 영상편지를 전하는데 가족들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고 가족의 소중함, 가족애를 느꼈다. 그리고 페러 글라이딩을 하러 갔다. 페러 글라이딩 내 생에 첫 경험 기대대고 긴장되었다. 비행 직전엔 의외의 높이에 놀라 약간 무서웠다. 그러나 언덕에서 발이 떨어지는 순간 기분이 묘했다. 그때 그 순간의 기분은 정말 좋았다. 그렇게 약 30여 분간을 날고 착지하였다. 안나푸르나가 구름과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었다. 다시 수니타씨 어머니 댁에 돌아갔다. 가서 수니타씨 어머니께서 해주신 밥을 먹고 캠프파이어를 피워 놓고 현지 친구들과 이별을 앞두고 마지막 애기를 나눴다. 그 사이 서로 정이 들었는지 우리에게 그들의 춤을 보여줬다. 밤이 깊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우리는 헤어졌다.

 

2014.01.09. 목요일 여행 열한 번째 날

아침이 밝았다. 포카라에서의 일출을 보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쉬웠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지윤(시은이 형이 현지인에게 지어준 이름)이 우리를 찾아왔다. 아쉬웠는지 시은이형과 마지막으로 인사하며 서로 선물을 교환 했다. 다시 카트만두로 향했다. 중간에 한번 내려 구름다리를 통해 강을 건너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 사이 형들과 누나들은 한국에 가져갈 돌을 주웠다. 그리고 다시 카트만두로 향했다. 사이에 국제 기아 단채에서 운영하는 에버 버전 스쿨에 들려 털모자 약 50개를 기증했다. 다음 한국인 부부가 하시는 고아원에 갔다. 아이들이 정말 귀여웠다. 네팔은 아직도 옛날의 우리나라처럼 남자를 중시 여겨 여자 아이를 버린다고 한다. 그런 아이들을 데려와 네팔어, 한국어, 영어를 가르치고 친 자식 친 자식 이상의 정성으로 키우는데 정말 존경스러웠다. 고아원에서 아이들과 간단히 만두와 과자를 먹은 후 아쉽지만 다시 카트만두로 향했다. 카트만두에 도착해 호텔에서 이틀 밤을 묶게 되었다. 오랜만의 따뜻한 물이라 다들 기분이 좋아 보였다.

 

2014.01.10.금요일 여행 열두 번째 날

네팔에서의 실질적 마지막 날 과..대 앞에서 모여 출발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날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마지막 날이자 제일 바쁜 날이었다. 우선 우리는 꺼멀씨의 집에 방문 하여 영상편지를 전하였다. 그리고 꺼멀씨의 큰형님과 희은이 누나 생일 파티 약속을 잡았다. 그리곤 비노드씨의 집에 방문했다. 마지막 날 마지막 방문 다행히도 별탈없이 영상편지를 전하고 우리는 네팔의 유적지를 방문했다. 유네스코에 등록되 네팔의 화장터를 방문했는데 문화 충격이었다. 사람을 태운 재가 날리고 시신이 보이며 타고 남은 자리에는 원숭이들이 뛰어다녔다. 사람이 죽고 나서 한 줌의 재도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많은 기분이 들었다. 분위기가 엄숙했다. 화장터를 한바퀴 둘러 보고 나오는데 한국에서 온 관광 단채가 보였다. 마스크를 쓰고 어수선하게 떠들며 사진을 찍는걸 보고 정말 부끄러웠다. 그 단체를 보며 혹시 우리가 또는 나 혹은 나의 가족들이 아무 생각 없이 무례한 행동은 없는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와서 챠챠 카페라는 곳에 갔다. 그곳에서 희은이의 누나의 생일 케이크를 나눠 먹고 밥을 먹었다. 정말 맜있었다. 그곳에서는 꺼멀씨의 큰형님께서 사주셨는데 너무 감사했다.‘저런 게 비즈니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한번 보고 말 사람들인데...’라는 생각이였는데 생각해보니 한국에 꺼멀씨가 계셨다. 역시 가족이 좋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즐겁게 헤어지고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는데 아침이었다.

 

2014.01.11.토요일 여행 열세 번째 날

집으로 돌아가는 날 아쉽고 기뻤다. 마지막으로 오전에 유적지를 쭉 걸으며 보고 돌아가면서 쇼핑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빵이 먹고 싶어 길을 대충 외운 후 빵집을 찾으러 갔다. 그러나 길을 잘 모른채 떨어져 움직여 은민이 누나, 도연이 그리고 나는 결국 길을 잃고 만다. 바로 옆이라는 말을 믿고 길을 찾고, 찾고 찾았으나 결국엔 찾지 못하고 현지인의 전화기를 빌려 스쿤다 삼촌께 전화했다. 곧 삼촌이 오셨다. 우리는 너무 미안했다. 그렇게 현지인의 말과는 달리 몇분을 걸어 호텔에 도착했다. 눈치가 너무 보였다. 형과 누나들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 우리 때문인가라는 생각이었는데 알고 보니 피곤한 표정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맘이 놓였다. 공항 근처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우리는 전날 그리고 당일 준비했던 롤링 페이퍼를 스쿤다 삼촌에게 건넸다. 아쉽게도 운전기사들 것은 미처 생각 못하고 준비 하지 못해 쿠키를 드렸다. 스쿤다 삼촌도 우리에게 티셔츠를 선물 해 주셨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공항 앞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공항 입구에서 들어가는데 운전기사 분들께 너무 미안해 손을 흔들어 드리니 기사 분들도 우리에게 끝까지

흔들어주셨다. 항상 웃어주시고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공항에 들어오니 되게 그립고 보고 싶었다. 쿤밍 행 비행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역시나 연기 되었다. 그래도 생각 외로 적게 연기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비행기를 기다리면 무료하고 심심해서 과자를 먹으며 기다렸다. 그때 난 과자와 빵을 먹으면 안 되었었다. 쿤밍 공항에 도착하고 자리도 잡고 일정이 정말 끝났다. 남은 일이라곤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상해 가서 부산 가는 거였다. 그러나 난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아침 빵의 저주는 끝나지 않았었다. 길을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 배탈이 났다. 쿤밍 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배고픈 나머지 평소 소화가 잘 되지 않던 빵을 너무 많이 먹었던 같다. 긴장이 풀리면서 배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배가 아파 저녁을 굶었다. 단순히 체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굶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굶음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시작 댔다. 그래도 계속 아파서 소화제를 먹었다. 그러니 괜찮아지나 싶었는데 좀 시간이 지나자 땅 멀미 비슷하게 울렁거리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렇게 새벽 4시까지 화장실을 붙들고 있다 쓰러지듯 잠들었.

 

2014.01.12.일요일 여행 마지막 날

아침부터 공항 병원에 있었다. 나 때문에 비행기도 한번 놓치고 그때 정말 미안했었다. 나 때문에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이 정말 싫고 미안했었다. 그래도 형 누나들이 잘 챙겨준 덕분에 무사히 와서 되게 고마웠고 그렇게 끝이 났다.

마무리하면서 나에게 있어 여행 학교란 첫 경험인거 같다. 이번 여행 학교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 학교를 통해서 친구 사귀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과 언어의 중요성 그리고 현재위치에 감사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 학교를 통해 돈이 전부가 아니란 걸 느꼈고 공부의 중요성 그리고 단지 돈 많이 버는 것이었던 나의 꿈을 다시 한 번 생각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