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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배달부 프로젝트/제13차 영상편지(2014)

제13차 사랑의배달부 프로젝트

베트남 사랑의 배달부

 

 

 

 

 

설레임 반 기대반으로 시작된 사랑의 배달부

 

주어진 시간은 두 달이었지만 막상 준비하고 짐을 싸는 시간은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었다. 짐을 꾸리면서 이제 정말 가나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하노이(Ha Noi), 강이 흐르는 내륙지방이란 뜻으로 약40길이의 홍강이 흐르고 있으며, 베트남의 수도로 문화의 중심지이자 크고 작은 20여개의 짙은 녹음이 인상적인 곳이다. 베트남은 북부답게, 아열대 계절풍의 기후로 4절기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과 비교한다면 여름은 고온다습하고, 겨울은 비교적 시원하고 건조한 날씨를 가지고 있다. 베트남 전쟁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황폐해진 도시를, 그 후 구획을 정비하여 남부 호치민에 비해서 비교적 잘 정비된 거리 모습이 특징이다. 하노이는 호완끼앰 호수를 중심으로 북쪽의 구시가지와 한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쭝화, 미딩이 있는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남부 호치민과는 달리 역사, 관광 등 볼거리가 한 지역에 밀집되어 있지 않다. 교통은 남쪽에 호치민과 길고 폭이 좁은 베트남의 국토에 열차, 버스들에 종착역과 출발점이 있으며, 도심에서 약 40떨어진 곳에 노이바이(NOI BAI) 국제공항이 있으며 자동차로 약40분정도 소요된다. 한국의 시간과는 2시간 앞서고 날씨는 평균 아침이 10도 내외 한낮에는 15내외의 기온으로 우리나라의 초가을의 전형적인 날씨와 같다고 보면 된다고 한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하며 여행을 기다린다. 여행비용은 본인부담으로 항공료 860,000만원 체류비 300,000여만을 합하여 1,150,000원을 들여서 가는 여행이다. 공적인 일로 가는데 무슨 돈이 필요 하느냐고 하지만 겉에서 보는 사람들의 입장이고 돈을 들여서라도 가야하는 입장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행 전 날 각 베트남 가정에 보낼 선물(본인의 집에 보낼 선물과 센터에서 준비한 선물; 방문 기념으로 양말 한 세트씩 준비함(김인겸), 아이들 장난감, 볼펜 등)들을 포장하여 단체짐을 꾸려서 여행 떠날 준비를 마치고 출발을 기다린다.

 

사랑의 배달부 첫째날(129)

 

 

아침 0730분 사천다문화 통합지원센터에서 이정기목사, 이예리, 김인겸 3명이 카니발에 탑승하여 여행을 시작하였다. 09:05분 김해공항에 도착하여 정초원자매와 도킹하여 출국수속을 밟았다. 출국수속은 예리를 중심으로 초원자매가 도왔으며 300달러로 환전하는데 333,4000원정도 들었다. 10:00탑승 시작하여 11:00시가 다되어서야 이륙한다. 좌석은 29D, E 그리고 예리와 초원자매는 따로따로 앉아서 비행기여행이 시작되었다. 15:00경 하노이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심사를 먼저하고 수하물을 찾으러 간다. 입국심사는 사회주의 국가인데도 그렇게 까다롭지 않은 것 같다. 베트남과 한국과의 시간은 베트남이 2시간 빠르다. 한국의 날씨와는 상당히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다. 내리자마자 더위가 몰려오는 것이 속에 껴입은 내복과 겉옷을 한꺼풀 벗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가 없다. 우리나라의 봄에서 여름으로 옮겨가거나, 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을 맞이하는 시기의 날씨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수하물을 찾고 공항출구에 나오니 아주 낯이 익은 친구 두 명이 맞아주었다. 운전기사와 15인승 승합차를 대동하고 나타났는데 아주 기쁨도 두 배가 되었다. 운전기사도 한국에서 9년간 있었다고 한다. 하노이 공항은 김해공항보다 시설 면이나 여러 가지 상황이 조금 떨어지다는 생각이 든다. 공항에 도착하여 인사를 마치고 짐을 실은 후 바로 사랑의 배달부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가정은 의 집으로 공항에서 약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집의 형태는 베트남의 전통가옥으로 앞 면적이 자고 뒤로 길게 지어졌고, 3층으로 된 건물과 들어가는 입구에는 마당과 소와 닭을 키우는 막사가 자그마하게 지어져있다. 대문을 들어

서자 개와 고양이, 그리고 토종닭이 보이고 우리와 명절이 같은 설날이기 때문에 복을 기원하는 상징인 벚꽃(사쿠라)과 유사한 나무를 크리스마스 트리 처럼 장식을 하고 카드에 소원을 적어 매달아 놓았다. 집안에는 조상신을 섬기는 제단이 있었고, 전반적으로 불교를 숭상하면서도 다신을 섬기고 있다. 어머니, , 형수, 조카들이 반가이 맞아주었고 서로 기쁨으로 인사를 나누었으며 통역은 한국 다문화센터에서 한국어 공부를 우수하게 하고 있는 친구 부느딩이 휴가차 베트남에 들어가 있어서 담당하였고, 꾸엔도 함께 거들었다. 베트남의 고유음식들이 차려져 나왔고 잠시 베트남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준비해간 영상편지를 전하였다. 영상편지를 다보고 나서야 아버님이 도착한 관계로 다시 한번 영상편지를 전하고, 다시 한국에 있는 에게 전할 가족들의 영상편지를 찍고 난 후 가족들과 전체 사진촬영을 하고 다시 가족들과 삼삼오오 어울려 사진을 찍는데 언제 이렇게 환하게 한국 사람들과 웃으면서 사진을 촬영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바나나 잎에 싼 밥 종류는 약간 맛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꿀에 찍어서 먹으라고 권하여 꿀에 찍어 입에 넣으니 맛이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다. 망고, 용과, 자몽, 베트남 떡, 해바라기 씨, 베트남 녹차는 맛이 조금 찐하게 먹는 스타일인가 떪은 맛이 많이 난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웃고 울고 그리고 아쉬운 작별을 뒤로한 채 집을 나서서 다음가정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보람을 느끼는 행보인 것 같아 참 기분이 좋았다.

 

   

두 번째 가정은 스케줄에 없었던 년만의 가정에 방문하였다. 원래 일정에 없어서 영상편지를 제작하지 않았지만 현지 친구들의 안내로 집에 들어가니 아버지와 이모님께서 반가이 맞이하여 주셨다.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근무한지 3년 만에 휴가를 나왔다고 한다. 단지 한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이라는 인연으로 베트남가정을 방문할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자연스러운 분위기다. 이슬람권의 가정도 기독교도로써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베트남은 규제가 그렇게 심하지 않은 불교권이지만.... 1시간여를 대화를 나누고 아쉬운 작별을 하고 다음가정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다.

 

세 번째 가정은 뚜언 가정으로 자신은 베트남 표를 구하지 못하여 한국에 머무른다고 하여 영상편지를 제작하였는데 집 근처에 도달하니 반가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뚜언이 어렵게 표를 구하여 그리운 집으로 휴가를 나왔단다. 집에 도착하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형과 형수 그리고 여동생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본인이 휴가를 받아 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상편지를 보는 동안 가족들의 눈시울에 눈물이 맺혀있음을 보았다. 아마도 타향살이에 지쳐있을 자녀의 어려움을 바라보게 되고 또 다문화센터에서 한국어를 가르쳐주던 선생님들이 자기들의 집에 방문에 주는 고마움의 표현이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본인이 집에 있으므로 가족들의 영상편지는 찍지 아니하고 가족들과 함께 전체 사진과 다양한 포즈로 끼리끼리 사진촬영을 하고 저녁 만찬을 가졌다. 베트남에서의 첫 번째 식사의 초대자리 인지라 어떤 음식이 나올까 희망에 부풀었다. 잘 차려진 만찬의 자리는 흡사 샤브샤브라 부를 수 있는 음식상이었다. 소고기, 돼지고기, 오리, 소의 위, 야채(브로콜리, 양상추, 배추, 숙갓), 베트남 떡, 그리고 대추, 수박 등이 어우러진 식탁은 참 멋진 만찬이었다. 그런대로 먹을 만하고 돼지고기 샤브샤브도 좋았던 것 같다. 닭고기는 쪄 놓은 것 같은데 먹기 좋을 만큼의 크기로 잘라 놓아서 먹기는 좋으나 차갑고 기름이 응어리진 것이 가끔 있어서 먹기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베트남 사람들은 명절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장시간 동안 천천히 그리고 이야기하면서 먹는 문화가 형성되어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 식사의 정서는 장시간 이야기하면서 먹는 분위기가 아니고 빨리 식사를 끝내고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하지 않은 탓에 그들과의 식사보조가 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의 식사문화도 여유를 가지고 저녁만찬의 자리는 서로가 이야기하면서 즐기는 시간이 되어야 하리라 생각이 든다. 식사 후에 차와 함께 디저트를 가졌다. 베트남 차는 잎 녹차를 주로 먹는데 조금 떫은맛이 많이 든다. 그래도 자주 마시다보니 그런대로 향을 즐기면서 마실 수 있는 것 같다. 20:00시경 아쉬운 정을 뒤로하고 22:00경 하노이 외곽지역 숙소로 향하였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여름한철에 결혼식 또는 잔치를 하는 단체손님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장소인 것 같다. 중간 중간에 홀이 있는 건물이 눈에 뜨이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괜찮은 것 같다. 숙소는 단층으로 된 방으로 방2개에 3일 동안 60달러라고 하는데 방값은 정말 싼 것 같다. 방 마다 화장실이 딸려 있고 전기순간 온수기가 달려 있어 따뜻한 물을 사용할 수는 있으나 물이 졸졸 흐르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래도 찬물로 씻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샤워를 마치고 나니 피로가 몰려온다. 목사님은 찍은 사진을 저용량으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사역을 정리하시느라 바쁘다. 잠자리에 들면서 앞으로의 다문화사역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잠이 들었다.

 

두 번째 날의 여행이 시작되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서너번의 잠을 깼다가 잠이 들어 피로가 더 쌓이는 가운데 6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숙소의 문을 나서니 저녁에 잘 보이지 않았던 연못이 눈에 뜨인다. 중간 중간에 벤치가 놓여있고 꽃나무들과 가로수가 심겨져 있어서 그런대로 분위기가 있어 보인다. 단점은 물이 뿌옇게 되어 있어서 무슨 물고기들이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가다가 숨쉬기 위해 물위로 떠오르는 것이 잉어나 붕어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시설 내를 둘러보고 도로변에 나오니 많은 오토바이 부대가 일자리를 향해 달려가는 역동성이 보인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 희망과 소망이 보인다.

 

08:00에 부노딩과 반도가 숙소에 도착하고, 출발하여 그 유명한 베트남 쌀국수를 먹기 위해 찾아보다가 그 중에서도 잘한다고 소문난 쌀 국수집에 들려 전통 쌀국수를 먹게 되었는데 3~4가지의 종류의 쌀국수가 있다고 한다. 소고기, 생선, 오리, 닭 중에서 오늘은 소고기와 생선을 시켜서 맛을 보았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하기는 한데 향신료가 입맛에 맞지는 않는데 베트남고추(크기는 작으나 빨갛고 매운 맛이 강함)를 넣고 낑깡(신맛)의 즙을 넣으니 조금 중화되는 것 같아 먹기가 한층 수월하다.베트남 사람들은 아침밥을 거의 사서 먹는다고 하는데 가격을 보니 이해가 되기도 하다. 8그릇에 한국 돈으로 12,000원 지불하였다. 2시간 30분정도 달리고, 묻고 또 물어서 투언의 가정에 당도하였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동생, 조카등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투언은 베트남에서 이혼을

하고 한국 사람하고 국제 결혼하여 베트남 친정집에 9살난 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예쁘게 잘 생겼는데 사시끼가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여유가 된다면 관계자들과 의논하고 조인하여 사시를 교정시켜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집에 방문하면서 금귤나무와 화분을 사서 집에 당도하여 화분에 옮겨 심어주고 사진을 찰칵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영상편지를 전달하는 과정에 딸의 마음이 얼마나 서글펐을까하는 마음에 눈시울이 뜨겁고, 당사자도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울면서 눈물이 비친다. 가족들의 영상편지를 제작하고 다함께 모여 끼리끼리 모여서 사진을 촬영하고 차와 함께 다과를 나누고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영상을 보고난 9살난 딸이 웃음을 잃은 것이 안타깝다. 투언 집에서는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단층집으로 주거시설과 주방시설이 분리되어 건물이 2개이나 주방시설과 화장실 건물을 나중에 지은 것 같다. 투언 집의 전경을 찍기 위해 맞은편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건물 안에서 부른다. 자신들도 한 장 찍어달라고 하여 휴대폰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더니 돈을 주면서 한 장 보내달라고 손짓으로 이야기한다. 말을 하였지만 무슨 말인지는 모르나 몸짓과 손짓으로 보건대 사진값을 줄테니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투언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하고 돈을 사양하고 차한잔을 마시고 집을 나왔다. 색다른 경험이었다.

 

투언의 집을 가기위해 하롱배이를 근처를 지나서 왔기 때문에 시간도 약간 남아서 하롱배이를 관광하기로 하고 달려간다. 30분가량 차를 운행하는 동안 점심을 먹을 만한 장소를 찾아보았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하롱배이에 도착하여 식당을 찾아 들어가니 횟집과 베트남 음식을 함께 요리하는 식당이었으나 횟값이 장난이 아니다. 터무니없이 비싼 것이 한국의 2배가 넘는 가격으로 엄청난 바가지를 씌운다. 사천지역의 횟값도 만만치 않은 가격인데 정말 해도 너무한 가격이다. 그래서 나오기는 뭣하고 베트남 음식을 시켰는데 별로 먹을 것도 없는데 가격은 관광지를 감안하고라도 비싸다. 8명이 먹은 것도 없이 10만원 가량이나 들었다. 식사 후에 하롱배이를 둘러보는 유람선을 탔을 때 8시간이나 걸리고, 가볍게 돌아오는 코스로는 2시간이 걸리는데 가격도 가격이고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은 일정인지라 항구에서 멀리 안개 속에 보이는 바닷속의 높게 솟은 섬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였으나, 운전기사가 돌아오는 길을 해변으로 돌아가는 도로로 주행하여 달려가는 동안 안개가 그치고 해안가에 당도하니 많은 섬들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바로 하롱배이가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나라의 바닷섬들은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으나 쾌 높은 섬들이 군도를 이루는데 가까이에 가서 보면 절경일 것인데 아쉬움이 남는다. 즐거운 마음으로 다음가정을 향하여 여행을 계속한다.

 

다섯 번째 가정은 부노딩의 집이다. 잠시 일차 나갔던 꾸엔이 합류하였다. 한국에 와서 한국어 교실을 통하여 중급이상의 TOPIC시험에 합격한 유능한 청년으로서 휴가차 베트남에 먼저 입국하여 통역과 안내를 주로 담당하는 이번 여행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사람이다. 자신의 가정으로 먼저 인도하지 않고 처갓집으로 인도하였다. 처가에는 할아버지, 장인, 장모 큰 처남과 처형, 작은처남과 처남댁 그리고 부노딩의 처와 아이와 조카들이 모여서 반겨 맞아주었다. 장인댁이 한국으로 많은 사람들을 파송한 한국계집안인 것 같다. 큰 아들내외가 한국 왜관에서 근무하다가 만나 결혼을 하여 산달이 되어 5년간 일한 며느리가 먼저 귀국을 하였고, 부노딩이 현재 한국에 있으며, 처남도 한국에 유학생으로 경주에서 살다가 베트남으로 들어와서 회사에 다닌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한국에 많은 인원들이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큰 며느리의 애교 넘치는 음성이 가정을 화목하게 만들고 웃음꽃이 활짝 피게 하는 복덩이가 분명하다.

 

 

 

여섯 번째 가정으로 부노딩의 집으로 향하여 간단한 차를 마시면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하여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반도의 모친과 형이 함께 참여하였다. 12시부터 시작되는 새해맞이 불꽃을 구경하기 위해 11:00경 집을 나서서 먼저 자리를 잡는데 도착하니 11:20분경이라서 호숫가 잘 보이는 장소에 자리를 정하고 불꽃쇼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공원에 설치된 공연장에서는 베트남 전통 뮤지컬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호숫가 쪽에 위치해 있어서 사람들이 거의 볼 수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카메라 촬영이 있어서 큰 행사이긴 한데 공원 중앙에 설치하였더라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고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01:00가까이에 숙소에 들어왔는데 집주인 차를 한잔 마시자고 하며 초대하였다.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안부인사와 대화가 오갔는데 음식을 내와 함께 나누자고 한다. 참 오늘은 푸지게 먹은 날로 기억될 것이다. 아직 하루를 더 묵어야 하나 부노딩이 새해가 되었으니 먼저 숙소비를 계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자신이 준비한 60달러를 주인에게 드리니 주인의 기분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이것도 하나의 기분 좋게 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해 첫날부터 타인이 가정을 방문하여도 기분 좋게 맞아 주시는 것이 마냥 미안하기도 한 반면 감사한 하루였다. 시간마다 때마다 함께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늘도 안전하게 먼 길을 돌아오는 길을 지켜주시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인사하고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생과 희망 주시기를 소망한다.

 

 

 

 

베트남에서의 세 번째 날이 밝았다.

 

09:10 일곱 번째 가정으로 반도 집으로 사랑의 배달부는 계속되었다. 반도 집으로 가는 도중에 마을 공동으로 제사하는 절에 들려야 한다고 하여 절을 돌아보았는데 절이라기보다는 조상신들을 섬기는 제단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반도의 가정에 도착하니 아버지, 어머니, 형과 형수 그리고 여동생, 조카가 반겨준다. 형은 가구를 만드는 목수의 일을 한다고 한다. 차를 나누어 마시면서 인사를 하고 식사를 대접받았다. 본인이 먼저 베트남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영상편지는 제작하지 않았다. 푸짐한 상이 차려졌는데 명절이라서 그런지 대부분 같은 음식이 차려졌으나 이 가정에서는 월남쌈이라고 부르는 아주 얇은 전병이 준비되어있어서 그것으로 싸먹는다고 한다. 뜨거운 물이 없이 바로 싸서 먹는 전병으로 간단하게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집에서 기르는 양어장이 조그마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폼나게 낚시를 한다고 사진은 찍었으나 고기는 낚지 못하여 웃음으로 마무리 하였다. 집 뒤쪽에 가족묘가 있었는데 화장하여 유골을 땅에 묻어놓은 것 같이 대부분 묘가 마을 공동묘지로 동네 중간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자기 조상들의 묘인지는 모르겠으나 집과 거의 떨어지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묘를 사용하고 있다. 불교의 윤회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이요 다시 좋은 모습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상들을 잘 섬기고 선행을 쌓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조상의 묘도 동네 중간에 모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식사 후에 가족들과 어울려 사진을 촬영하고 반도의 모친과 여동생과 함께 가까운 절에 다시 관람을 하는데 이곳은 학자들을 모셔놓은 사당 비슷한 절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팔공산에 가서 대학입시통과를 기원하는 제사를 드리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지 않으면 합격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정치계의 사람들도 이곳을 거쳐 가야 한다고 한다.

 

 

여덟 번째 가정으로 단딘의 집으로 향한다. 가족들이 가장 많이 모인 것 같다. 갈수록 인근지역의 가족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부의 상징인 오토바이들이 마당에 꽉 차기 시작한다. 준비해온 영상편지를 전달하고, 가족들의 영상편지를 제작하며 그리고 가족들과의 기념사진도 찍고 차와 다과를 나누면서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속 깊은 이야기는 마음속으로). 가족들이 많이 모이기는 처음이라 영상편지를 전하는 것이 뿌듯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홉 번째 가정으로 꾸엔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버지와 어머니, , 누나, 여동생 그리고 자형과 매제, 조카들이 반겨 맞아 준다. 차한잔을 마시고 대화하다가 걸어서 10분거리에 있는 꾸엔 집의 소유 민물고기 양식장으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방패연과 가오리연이 있었는데 제법 큰 것이 있었고 바람을

타면서 소리를 내는 연이었다. 연실을 찾아 연을 날리는데 적당한 바람도 불어서 날리기에는 좋은 시기여서 과연 날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지켜보았는데 부노딩이 과연 선수인 것 같다. 참 유능한 친구가 아닌가 다시한번 감탄한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연줄을 잡고 달리기 시작하면서 2~3번 만에 드디어 연이 공중을 날기 시작하였다. 모두 환호! 환호!! 참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누려보는 시간이 참 행복한 마음으로 다가온다. 저녁식사는 또 만찬으로 차려졌다. 매 끼니마다 고기와 야채로 채우다보니 조금만 먹어도 벌써 배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성의를 생각하여 꾸역꾸역 자꾸 입으로 가져간다. 오늘은 특별히 물소고기와 어묵 튀김이 입맛을 사로잡는다. 차를 즐기며 TV를 시청하면서 호박씨나 해바라기 씨를 까먹는 풍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참 한가롭고 정이 느껴지는 하루였다. 20:00에 숙소에 도착하여 오늘의 일정을 돌아보면서 정리하고 내일의 마지막 일정을 준비한다.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일정

06:00에 기상하여 오늘 하루를 열어주시는 하나님아버지께 감사와 찬송과 존귀를 돌려드리며 오늘 찾아가는 괏테리의 집의 평안을 기원한다. 민주주의(월남)과 사회주의(월맹)과의 피비린내 나는 동족간의 전쟁은 흡사 우리나라의 남북전쟁과 그 맥락을 같이 하지만 하나의 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도 국민들의 생활방식은 자유롭기만 하다. 사유재산의 허용, 자유로운 왕래, 단지 틀린 것은 자유주의 정권이 아니라 사회주의 정권체제하에서의 국가운영을 한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북한의 문이 열려 베트남과 같은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개방의 바람이 불어 개인의 이권을 포기하고 국민을 살리기 위한 정책으로 전환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은 쌀국수를 우리 가족들에게 대접하려고 생각한 대로 전에 가서 먹던 장소와는 다른 곳으로 인도해서 그곳에서 맛있게 먹고 한국 돈으로 12,000(베트남240,000)값을 지불하였다.

 

사랑의 배달부 열 번째 마지막 가정인 괏테리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다. 아직 괏테리의 집으로 가기에는 이른 시각이고 마지막 가정이며, 오후 12:55분 비행기라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시내 투어를 하기로 하였다. 처음 들른 곳은 베트남의 영웅 사회주의국가를 탄생시킨 호치민 주석이 모셔있는 호치민 주석궁과 일생동안의 생애를 전시한 박물관 그리고 생전에 살았던 생가를 복원한 공원 등으로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특히 호치민 주석을 모셔놓은 사당은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통제하기 시작하여 건물입구에 군인들이 줄을 지어 삼엄한 경계속에서 엄숙하고 숙연하도록 분위기를 이끌었다. 건물내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며 오전시간과 오후시간 사이에 점심시간은 관람이 불가하여 시간대를 지켜야 관람할 수 있었다. 일행은 아슬아슬하게 시간대에 맞추어 입장할 수 있었고, 개별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정수의 인원을 모아서 2줄로 맞추어 입장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주석궁에 안치되어 있는 호치민 주석은 미이라로 보존되어 생존의 모습을 유지한 채로 누워 있었다. 말로만 듣던 미이라로 만들어 영구보존하겠다는 김일성일가의 모습과도 유사한 사상인 것 같다. 죽어서도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거늘 죽으면 말이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박물관은 3층으로 되어있어 참 영웅의 대접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우리나라의 영웅은 과연 누가 있을까? 우리나라의 영웅들은 이러한 대접을 받고 있을까? 생가를 기점으로 집무하던 장소 타고 다녔던 차 등을 전시해놓은 넓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중간에 연못도 있고 건너가는 다리도 만들어 놓고..... 많은 외국인들과 베트남 사람들도 휴일이 사람들이 많다. 다음 장소는 호수였는데 수중 인형극이 유명하다고 한다. 도착해 보니 사람들의 물결이 파도와 같고 아니 오토바이의 물결이

넘실된다고 하여야 할 것 같다. 다시한번 오토바이가 대중교통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설 명절에 많은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나와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저들을 바라보면서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가족들이 많이 모였을 때에 좀 더 즐겁고 기쁜 명절이 될 수 있도록 가족단위의 여행도 괜찮은 방법이리라 생각된다. 괏테리의 집으로 가는 동안 운전기사가 하노이 부근은 지리를 잘 몰라 옆에 동승한 꾸엔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운전자의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헤매다가 도착하게 되어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었다. 15:00경 괏테리의 집에 도착하여 영상편지를 전달하고 많은 가족들이 모였으나 영상편지가 제법 길어 어수선해지고 돌아가는 친지들도 있었다. 마지막에는 가족들 측근들만이 남아서 끝까지 영상편지를 시청하고, 가족들의 영상편지를 찍고 가족들과 함께 어우러져 기념사진을 찍었다. 웃기는 포즈로 다정한 포즈로 가족단위로, 그리고 찍고 싶은 사람들과 즐거운 미소와 더불어 사진을 담았다. 가족들의 따뜻함과 정겨움을 느끼면서 저녁 만찬을 즐긴다.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되었다. 언제 다시 이러한 베트남 가정에서의 식사를 만날 수 있으며 함께 만나서 잘 되지 않는 언어로 이야기하면서 만찬을 즐기는 시간이 있을 것인가?

 

18:00경 아쉬운 정을 뒤로 하고 공항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국의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으나 저녁시간이고 명절인 관계로 열어놓은 상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차한잔을 마시려고 찾아보았으나 참 일찍이도 문을 닫았다. 시간이 오후 8시도 안되었는데....

할 수 없이 공항에서 티켓팅을 먼저하고 차한잔을 마시면서 경비를 정산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그때에서 부터였다. 숙소비까지는 기분 좋게 출발하였으나 차량대여비와 운전기사에게 줄 금액이 문제였다. 얼마간의 차이는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터무니없이 많은 금액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당초 하루 일당을 차량대여비와 함께 기사 포함하여 한국 돈으로 6만원을 예상하였으나 하루 일당 15만원을 요구하고 있으니 참 난감하기만 하다. 그래도 좋은 것이 좋다고 35일의 일정동안 가이드해준 친구들을 얼굴을 봐서라도 좋게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수고해준 운전기사를 생각하여 얼마간의 돈을 더 주리라고 마음먹었으나 참 많이도 부른다. 일정동안에 거의 끼니를 방문하는 가정에서 대접을 받아 식사비용에서 절약할 수 있어서 충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한 일이다. 얼굴 찡그리지 않고 해결하여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차량 대여비(운전기사 포함) 550달러, 숙소비 포함 하롱배이에서 점심값, 아침 쌀국수 한 끼 및 입장료 등등 145달러(부노딩)를 지불하였다. 출국수속을 밟기 전에 커피를 파는 곳이 눈에 띄어서 선물을 대강 샀다. 커피 콩 4봉지(15,000원 상당), 다람쥐 원두 갈아놓은 것 11(개당 6,000), 원두커피 갈아놓은 것 5(개당 5,000), 2(개당 5000) 3,240,000(한국 돈으로 16만여원)을 지불하여 선물을 산다. 출굴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 화장품코너에서 아내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데 정초원자매의 조언을 받아 아이크림 72달러짜리를 선택하여 계산한다. 12:30분경 비행기 탑승을 위해 자리를 이동하고 비행기에 탑승후 기내식사가 나와 먹었는데 한구시간은 거의 04:00경을 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랄까 늦은 밤참 이랄까 식사를 마치고 눈을 감고 잠시 묵상에 잠긴다. 오늘 이시간까지 아무런 안전사고 없이, 아무런 몸의 아픈데 없이 시간마다 때마다 돕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잠시 잠이 드는가 싶었는데 김해공항에 거의 도달하였다. 기내에서 나누어 주어서 작성한 입국서류를 들고 입국심사를 마친후 수하물을 찾는데 단체짐이 조금 늦게 나왔다. 수하물을 싣는 과정에서 조금 지체되었던 것 같다. 수하물을 싣고 세관신고서를 제출하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이제야 한국 땅에 왔음을 실감한다. 약간 쌀쌀한 날씨가 우리 일행을 반겨 맞는다. 일단 공기가 다른 것 같다. 공항을 나서기 전 오늘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이정기목사(사랑의 배달부 팀장)가 드렸다. 참 감사하고 또 감사를 드렸다.

 

베트남 사랑의 배달부 프로젝트를 마치면서

 

베트남 말로만 들었던 사회주의 국가라는 개념과는 다르게 사유재산이 인정되고 많은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역동성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자전거 세대에서 바로 자동차로 연결되었지만 베트남은 자전거 세대를 지나면서 오토바이 세대로 대부대가 이동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이동하는데 있어서 오토바이가 생업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로였다. 부지런하게 활동하고,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고, 월남전에 파병한 장병들의 피 값으로 벌어들인 외화를 기점으로 우리나라의 경부선을 건설하여 경제의 중심을 만들었듯이, 많은 사람들을 외국에 특히 한국 등 동남아시아에 파송하여 벌어들인 외화를 가지고 도로와 항만 그리고 일할 수 있는 공장을 건설하면 머지않은 날에 경제부국으로 다시 태어나리라고 믿는다.

 

방문하는 가정마다 따뜻한 마음과 사랑으로 반겨 맞아 주시는 부모님의 모습은 한국의 다정한 이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식을 멀리 타국에 보내놓고 맘 조리며 자식의 안녕을 기원하는 부모형제들이 한국에서 가져온 자식의 영상을 바라보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영상편지를 가지고 온 선생님들을 자식 대하듯이 따뜻한 애정을 보내주시는 사랑에 감사드린다. 이제 계약기간을 만료하고 고국에 돌아갔을 때를 생각하여 저들의 삶이 더 풍요로워지고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새로운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4명이 한 팀을 이루어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서로가 도와가며 팀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써주신 일행에게도 감사한다. 특별히 이번 사랑의 배달부를 기획하고 현지에서 팀을 잘 이끌어주시고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고 인도해주신 이정기목사님께 감사드린다. 또 현지에서 가이드로 수고해주신 부노딩, 꾸엔, 반도 형제에게 감사한다. 가정방문을 통하여 저들의 삶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저들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도움을 주고 한글 공부는 물론 향후에 저들에 삶에 대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생각에 전환점을 갖게 된 것 같다. 사천다문화통합지원센터가 좀더 큰일을 감당할 수 있는 지원체계를 확립하는 것도 하나의 과제로 떠오르고 돈 없이도 관계자원을 활용한 일들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이 필요한 관건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하고자 하는 열심히 있는 자들에게는 도움의 손길을 예비해주시고 그때그때마다 도우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인도해주실 하나님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