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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여행학교/제4기 세계로 여행학교

<제4기 세계로여행학교 기행문 ① - 진주여고 2학년 이채연>

진주여고 2학년 이채연

 

사전교육

이번 여행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여행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 공부와 주변의 많은 일로 인해 어딘가로 떠나 마음을 정리하고픈 생각이 이번 여행에 참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를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6주간의 사전교육 기간과 1213일의 여행기간 동안 보고 느낀 것을 모두 담을 수 없겠지만 최선을 다해 나의 소중했던 여행을 추억하려 한다.

내가 원하고 자신의 의사 결정으로 한 여행이었기 때문에 여행에 대한 책임감이 컸다. 사전교육 첫날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란 것을 알았을 때 그 책임감은 더욱 커졌다. 첫날 박상혁 교수님이 강의하신 내용 중에 ·은그릇 보다는 깨끗한 그릇이라는 이야기가 그날부터 여행을 다녀온 지금까지 머릿속을 맴돈다.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라는 뜻인데 이번 여행에서 깨끗한 그릇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전교육에서 공정여행의 의미도 알고 방문국인 인도네시아의 동요인 뽀똥 베벡 앙사와 인도네시아 국가 인도네시아 라야도 배우며 차근차근 여행 준비를 했다. 4번째 사전교육에서는 우리가 방문할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는데 이 만남에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생각과 여행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에는 아주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들의 환한 웃음과 열정이 그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가득 안고 사전교육도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인도네시아

 

 810일 일요일 가족들과 아쉬운 환송식을 마치고 짐정리와 간단한 샤워 후 잠자리에 들었다. 깊게 자지 못했지만 기대감 때문인지 피곤하지는 않았다. 새벽 4, 김해 공항으로 출발했다. 김해공항 인솔자는 기범이와 양혜였다. 우리 모두 아무런 경험이 없었고 이른 시간에 출발했던지라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거기에다 세월호 사고 여파 때문인지 기내 반입 수하물 검색이 더욱 까다로워 정신이 없었다. 정신없어 보이는 센터장님과 공항인솔자들을 보며 여행을 잘 다닐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했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출국 게이트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멤버들의 표정을 보니 조금 전 내가 한 걱정들은 모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미리 걱정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한 번 더 하게 된 순간이었다.

정신없이 비행기에 올라타고 기내식을 먹고 홍콩공항에 도착했다. 경유하는 공항으로 유명하다는 말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기범이와 양혜가 큰 공항에서 환승하는 곳을 찾지 못해 여러 번 무거운 짐을 들고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한 후 드디어 환승하는 곳을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낯선 외국인을 보면서 거침없이 한국어를 섞어 물어보는 양혜를 보며 멋지다는 생각과 부럽다는 생각을 동시에 가졌다. 나도 공항 인솔할 때나 여행기간 동안 양혜처럼 행동해서 낯선 이와의 만남이나 대화에서 가지던 정체불명의 두려움과 무서움을 없애고 싶었다. 홍콩공항에서 타이완 음식을 먹었는데 우리의 양혜의 의사소통 실수로 인해 예산이 많이 넘었다고 했다. 나였다면 예산을 넘긴 것에 어쩔 줄 모르며 안절부절 했을 텐데 다 웃으며 넘기는 모습을 보며 과도한 예산 초과도 여행의 묘미인가 했다. 좀 여유로워졌는지 환승 게이트까지 척척 찾아오는 기범이와 양혜를 따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행 비행기로 몸을 실었다. 처음 내손으로 작성하는 입국카드를 맞게 작성했나 싶은 걱정도 들었지만 문제없이 입국심사를 마쳤다.

 

9시 경에 도착한 자카르타의 모습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인도네시아라는 국가 명에서 주는 동남아시아 국가라는 느낌 때문에 잘 정리되지 않은 수수한 도시의 모습일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고층건물이 들어차 있는 자카르타의 모습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사전교육 후에 인도네시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인도네시아를 후진국, 더러운 나라라고 생각했던 나를 혼내려는 듯이 밝혀져 있는 많은 불빛들이 부끄럽게 만들면서도 더욱 큰 기대감을 갖게 했다.

버스를 타고 영상편지를 전할 나의 담당 피흐리씨 집으로 이동하던 중 잠시 휴게소 비슷한 곳에 들렸다. 그곳에서 이동 중 먹을 간식도 사고 화장실도 이용했다. 인도네시아 화장실을 처음 보았는데 정말 휴지가 없었다. 인도네시아 화장실 상태를 보고 화장실 적응이 힘들 것 같은 느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밥을 먹고 씻으러 화장실을 들어갔는데 이건 정말 충격이었다. 이미 한 번 인도네시아 화장실을 경험 한 후라 걱정하지 않았는데 일반 인도네시아 가정집의 화장실은 정말 상상 그 이상이었다. 냄새나는 변기 바로 옆에서 흙이 약간 섞인 물로 함께 씻어야 했지만 오랜만에 하는 양치질과 세수에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깨끗한 화장실에서 깨끗한 물로 씻을 수 있는 한국의 환경에 감사했다. 간단히 씻고 난 뒤 수완다씨 집에서 다같이 잠을 잤다. 해가 일찍 뜨는 특성상 1시간정도 밖에 잘 수 없었지만 영상편지를 전한다는 기대감에 역시 피곤하지 않았다. 영상편지 전달을 위한 짐을 챙기기 위해 다시 버스를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는 길 도중에 보이던 병아리들이 너무 커서 처음엔 오리 인줄 알았다. 버스를 향한 길 도중에는 도로를 건너야 했는데 도로를 건너며 인도네시아 교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오토바이가 아주 많다는 것과 교통안전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버스가 있던 곳은 학교였는데 학교 앞임에도 불구하고 차들과 오토바이는 엄청난 속도로 지나다녔다. 습관적으로 횡단보도와 신호등을 찾던 나의 모습이 웃기면서도 열악한 인도네시아 교통 상황이 안타까웠다.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다 기다림을 찾지 못해 직접 옆 동네인 수완다씨의 집까지 직접 찾아오신 것이었다. 아침을 먹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의 집에 맛있는 것이 더 많으니 조금만 먹고 자신의 집에 와서 많이 먹으라던 어머니의 말이 생각난다. 그 말이 웃기면서도 당신의 아들의 소식을 가져온 우리에게 맛있는 것을 하나라도 더 먹이고픈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감사했다. 피흐리씨 어머니의 당부대로 아침을 조금만 먹고 드디어 기다리던 피흐리씨 집으로 이동했다. 옆 동네 인만큼 걸어서 이동하기로 했는데 옆 동네라고 치기에는 이동하는 시간이 꽤 걸렸다. 뜨거운 햇볕아래 걷기 힘드셨을 텐데 우리를 위해 직접 이 길을 걸어오신 피흐리씨 어머니가 대단하기도 하고 감사했다. 이동하던 길에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정말 풍경이 멋졌다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시골에 간다하더라도 넓게 펼쳐진 들판은 볼 수 없다. 대신 건물만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풍경은 달랐다. 저 멀리 수평선까지 아주 넓게 펼쳐진 들판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매일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만 봐오던 눈이 풀어지면서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할 수 있다면 인도네시아에 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동안 열심히 연습한 인도네시아 라야뽀똥 베벡 앙사를 아이들 앞에서 불렀다. 인도네시아 국가를 부를 때 아이들도 함께 불러주었는데 내 앞에서 우렁차게 부르던 남자 아이가 생각이 난다. 우리나라는 애국가를 부를 때 입만 뻥긋하거나 대충 가사를 읊조리는 경우가 많은데 인도네시아 아이들은 아주 힘차고 경건하게 국가를 불렀다. 그들에 비해 나라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턱없이 부족한 것 같아 반성했다. 분명 그들에게 배워야 할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동하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맨 앞에 서있던 기범이가 한 인도네시아 소녀에게서 사인요청을 받은 것이다. 기범이 뒤에 있던 나에게도 사인요청은 계속되었다. 그리고는 급기야 마치 아이돌 가수 팬 사인회장을 온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갑자기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너도나도 사인을 원하는 통에 당황스러웠지만 기분만큼은 아주 좋았다. 내가 살면서 언제 연예인처럼 사인요청을 받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연예인도 아닌데 우리에게 사인요청을 하는 아이들이 되려 신기해서 허빈 선생님께 왜 아이들이 이렇게나 사인요청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인도네시아 작은 마을에서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른 외국인을 보는 것은 이 아이들에게 연예인을 만난 것과 같은 엄청난 일이라고 말해주셨다. 선생님 말을 듣고 보니 이 아이들에게 우리가 연예인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 아이들은 우리를 잊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도 812일 화요일 인도네시아에서 겪었던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존재가 된다는 것은 소중하고 신비한 일이라는 것을 느낀 하루였다.

 

아이들과 정신없고도 기분 좋은 오전을 보내고 우리는 피흐리씨가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 한국어를 배웠던 학원으로 이동했다. 꽤나 먼 거리에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했는데 처음 타본 오토바이 뒷좌석의 느낌은 환상적이었다. 바람을 가르면서 달리는 느낌은 내가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펼쳐진 인도네시아의 풍경은 마음의 평화를 덤으로 가져다주었다. 한국어 학원에서는 한국으로 일하러 떠날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곳이다. 나는 우리와 함께 온 김수진 선생님과 수업에 참여했다. 수업은 한국어 능력 검정 시험이 토픽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평가내용은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였다. 꼭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토익시험 같은 느낌이었다. 이곳 한국어 학원의 수강생들은 토픽에 대한 정보를 집중에서 들었다, 그들의 눈에서 보이는 한국어에 대한 열의가 대단해 보였다. 수진 선생님의 말에 초집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영어를 배우는 모습이 생각났다. 영어를 필수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들만큼 열심히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 같은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영어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오토바이와 아쉬운 작별인사 이후 우리는 야니씨가 운영하고 있는 진주학원으로 향했다. 피흐리씨와 수완다씨의 집이 있던 인드라마유와 진주학원이 위치한 껀달시의 거리가 꽤 멀었는지 오후 1시쯤 출발한 우리는 밤 9시가 다되어 진주학원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만큼 얼른 짐을 풀고 쉬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하지만 다음 날에 있을 껀달 시 주최로 이루어질 전통 혼례 행사 준비로 진주학원은 밤 늦게 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출발하기 전 전통의상을 입고 사진 몇 장을 찍는 것으로 생각했던 전통 혼례 행사는 인도네시아 언론에서 취재까지 오는 국제행사가 되어 버렸다. 그 바람에 신부를 자처했던 양혜와 신랑인 기범이는 늦은 시간까지 전통 혼례 연습을 한다고 바빴다. 신랑 신부 외에도 신랑 측 부모님과 신부 측 부모님은 각각 나와 지민이, 솔비와 두현이가 맡았다. 우리나라 전통 혼례도 그렇든 인도네시아 중자바 지역의 전통 혼례도 엄청난 절차를 거쳤다. 힘들었지만 웃기기도 했던 연습을 마치고 잠자리에 든 나는 국제 행사가 되어 버린 전통 혼례 체험이 기대에 가득 찼던 것 같다.

 

 

전통 혼례 체험이라는 큰 과정이 지나간 후에 드디어 인도네시아 친구들과 만날 수 있었다. 막간을 이용해 잠깐 본 나의 얼굴을 고맙게도 나의 파트너는 잘 기억해 주었다. 나의 인도네시아 파트너의 이름은 디애나'였다. 디애나는 14살 이고 엄청나게 크고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예쁜 여자아이였다. 디애나를 본 순간 디애나에게 빠져 버린 나는 문화교류 내내 디애나앓이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디애나가 너무 좋았던 나는 디애나에게 많은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영어 실력에 힘들었다. 그래도 착한 디애나는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어 너무 고마웠다. 디애나에게 그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일을 손짓 몸짓을 동원해 설명해주고 인도네시아가 정말 좋은 나라이고 인도네시아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자 디애나는 정말 기뻐했다. 이렇게 순수한 사람들인데 그동안 너무 피하기만 하고 오해한 것 같아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인도네시아 아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석양이 지는 바다가 보이는 야외 수영장에서 함께 신나는 수구를 했다. 비록 의사소통은 잘 안되지만 몸으로 부딪히며 더 많은 정을 쌓았던 것 같다.

 

 

다음날 우리가 가져온 전투 식량과 컵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인도네시아 친구들을 맞이했다.(인도네시아에서 처음으로 먹은 한국 음식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인가. 나의 디애나가 오지 않은 것이다. 기대로 가득 찼던 내 마음은 곧바로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렇지 않아도 결혼식 준비로 인해 다른 아이들 처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는데 너무 아쉬웠다. 다른 아이들은 다 파트너와 함께 색면분할 그림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그리고 있는데 나혼자 그리려니 너무 슬펐다. 디애나가 정말 정말 보고 싶은 순간이었다. 결국 나 혼자 두 장의 그림을 완성하고 제일 큰 언니로서(파트너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센터장님과 기범이와 함께 색면분할 벽화를 완성했다. 벽화를 만드는 도중 벽화를 붙여놓을 칠판의 크기와 벽화 크기가 맞지 않았다. 크기 차이가 나는 사실을 알고 나는 이걸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에 멍해 있었지만 센터장님은 해결 방법을 바로 찾으셨다. 문제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바로 찾아내시는 센터장님의 모습을 보고 대단하고 멋지면서도 나도 척척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림 두 장으로 만든 벽화지만 내가 직접 그림을 붙이고 배열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어 완성한 벽화라서 그런지 완성된 벽화를 보고 마음이 뿌듯했다. 진주학원 벽에 붙어있는 벽화를 보면서 진주학원 사람들이 우리를 오랫동안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졌다. 기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진주학원에 오게 되어 걸려있는 벽화를 보면 기분이 색다를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귀찮고 힘들었지만 그림이 모여 만든 벽화 하나가 모두의 기억에 오랜 시간동안 남아 그때의 시간을 추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다. 디애나가 없어 다른 아이들과 파트너들처럼 눈물겨운 이별을 할 수 없었지만 그동안 정들었던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사실이 진주학원에서의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고 서로의 기억에 남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 인 것 같다. 난 아마 디애나를 다시 만나는 순간까지 귀여웠던 나의 디애나를 잊지 못할 것 같다.

 

말레이시아

 

저녁 비행기여서 그런지 말레이시아에는 밤늦게 도착했다. 발리 공항도 규모가 컸지만 말레이시아 공항은 더 큰 규모를 자랑했다. 이틀간의 말레이시아 일정을 같이 할 조은희 소장님의 동생분과 힐라 스쿨 선교사님을 만났다. 인상만으로도 좋은 분이시라는 것이 느껴졌다. 선교사 분들이 묵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루를 보내고 말레이시아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발리에서부터 허빈 선생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셨는데 아침에 좀 더 심해지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차를 타고 힐라 스쿨로 이동하였다.

 

힐라 스쿨은 아프가니스탄의 난민 아이들을 위한 학교이다. UN 관리하에 난민으로 인정받은 후 제3국으로의 입국 허가가 나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다니고 있다. 난민 아이들을 위해 세워진 학교라고 해서 건물도 되게 좋은 학교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일반 주택가 바로 옆에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누가 보면 일반 가정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평범했다. 나중에 왜 그런가 이유를 알게 되었다. 힐라 스쿨은 영리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원봉사나 주변의 도움으로 운영된다. 그 때문에 내가 생각했던 힐라 스쿨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우리는 힐라 스쿨에서 아침마다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힐라 스쿨 아이들과 처음 만났다. 나는 난민이라는 단어에서 주는 느낌 때문에 아이들이 우울하고 슬픈 표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힐라 스쿨의 아이들은 오히려 우리나라 아이들보다 더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함께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힐라는 아프가니스탄어로 소망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뜻 때문인가도 싶지만 모두들 마음속에 소망을 가지고 밝게 생활하는 것 같았다.

 

 

 

힐라 스쿨에서 각자의 파트너를 정한 뒤 우리는 ME-PLUS 라는 한인 기업탐방을 갔다. 이 기업은 현재 말레이시아 정부에 수도관을 납품하고 있는 기업이다. 한인 기업이 말레이시아 정부와 거래를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정도의 수준까지 올리는데 많이 힘드셨을 텐데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여주시는 것이 감사했다. 이어서 힌두교 사원도 갔다. 원숭이들이 아주 많았는데 계단을 오르는 중 원숭이가 나에게 돌진해서 깜짝 놀랐다. 다음은 말레이시아의 유명한 쌍둥이 빌딩이었다. 힐라 스쿨 친구들과 사진도 찍고 앞에 있는 공원도 걸었다. 멋진 쌍둥이 빌딩의 한쪽 건물을 우리나라가 지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대단했다. 새삼 대한민국 국민 이라는 사실이 뿌듯했다.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인들이 북적 댈 것이라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여러 민족이 모여 있는 다민족 국가였다. 건물도 높고 도시구성도 깔끔하고 깨끗했다.

 

말레이시아가 동남아시아에 위치해 있었다고 무시했던 내가 한심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힐라 스쿨에 모여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었다. 좋아 보이시는 인상과는 달리 청소년기에 많은 일을 겪으신 분이셨다.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이제는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사시는 모습이 감동적이고 멋있어 보였다. 선교사님께서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 다른 이의 문제까지 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멋져 보이면서도 현재 나에게는 너무 힘든 말 인 것 같았다. 나이가 더 들어 어른이 되면 나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이의 문제도 포용할 수 있는 어른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신나고 재밌었던 하루를 또 보내고 저녁을 먹었다. 이번 저녁은 태국음식을 먹었는데 태국 여행을 갔을 때 먹었던 음식과는 다르게 내 입맛에 꼭 맞았다. 말레이시아 일정을 끝으로 수진 선생님과 조은희 소장님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저녁시간이 어딘가 모르게 슬픈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 허전하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그날 밤을 마무리했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의 일정을 마치고 드디어 우리의 마지막 종착지 캄보디아에 도착했다. 프놈펜 공항에 도착하기 전 비행기 창을 통해 바라본 캄보디아의 모습은 그동안 다녔던 나라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 지르는 메콩강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건물들의 모습은 장난감 마을을 보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내가 인솔하게 될 프놈펜 공항에 도착했다. 몇 번의 공항 경험으로 익숙해져 있었겠지만 그래도 마음은 많이 떨렸다. 그런데 그런 떨림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사라졌다. 프놈펜 공항이 생각 외로 너무나 작고 아담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공항들과는 달리 몇 걸음을 떼지 않아도 거의 한곳에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한 곳에 모여 옹기종기 비자 발급 서류를 작성하고 입국심사도 무사히 마친 후 공항 밖으로 나왔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온몸으로 느껴지는 습기 때문에 헉했다. 인도네시아는 평년보다 시원한 편이어서 참을 수 있었지만 우기였던 캄보디아의 날씨는 정말 헉 이었다. 하지만 도시의 모습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보다 한결 자유롭고 편안해 보여 마음은 편했다. 앞의 두 나라보다 종교적인 제한이 덜한 것 같은 캄보디아의 느낌은 우리나라 농촌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의 캄보디아 일정을 도와줄 썬밧오빠를 만났다. 썬밧 오빠는 캄보디아 일정을 도와주시는 김기대 선교사님이 세우신 이삭학교의 스텝이었다. 또 썬밧 오빠는 우리가 책속홈씨의 집에서 설치해야 하는 솔라 홈 시스템의 기술자이기도 했다. 영어도 잘하는 썬밧 오빠와 함께하는 캄보디아 일정이 기대되었다. 저녁으로 기대하던 수끼를 먹으러 갔다. 코스요리 처럼 나오는 음식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배부르게 수끼를 먹고 주변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고 허빈 선생님과 솔비, 기주랑 이야기도 나누면서 캄보디아 첫날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빡빡한 일정 탓에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올 수 없어서 짐을 한방에 몰아넣고 세면도구만 챙겨 캄보디아 첫 집을 향해 떠났다. 가던 길 도중에 쌀국수도 먹고 열대과일과 과자도 먹으면서 이동했다. 나와 기주가 차의 맨 뒤 자석에 탔는데 편한 자리와는 다르게 에어컨이 오지 않아 너무너무 더웠다. 이러다가 쪄 죽을 것 같았던 버스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첫 집에 도착했다. 우기가 되면 물이 불어 침수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탓인지 캄보디아의 집은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아주 높은 곳에 집이 지어져 있었다. 꽤 높은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서자 높은 곳이어서 그런지 지면보다는 시원했다. 집 안에서 아이들에게 풍선을 불어주면서 놀아주었는데 캄보디아 아이들은 인도네시아 아이들보다 덜 적극적이었다. 인도네시아 아이들은 잘 웃어주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풍선도 불어달라며 활발했는데 캄보디아 아이들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 분위기에 살짝 당황하여 어찌해야 할 지 몰랐다. 왠지 인도네시아가 그리워졌다. 내가 아이들에게 더 웃어주고 말도 더 걸어보면서 풍선을 불어주면서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보려 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진땀을 빼고 있었는데 맛있는 점심이 나왔다. 우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느라 고생하셨을 부모님들을 생각해서라도(사실 배가 많이 고팠다.) 맛있게 먹었다. 고기반찬이 나왔는데 우리나라 불고기 같은 맛이 나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맛있다라는 말이 에낙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에낙을 하도 많이 외쳤던 터라 캄보디아에서도 밥을 먹으면서 에낙에낙을 외칠 뻔 했다.

 

 

캄보디아 둘째 날의 마지막 집인 미쓰사먼 씨의 집으로 이동하는 길은 어려웠다. 길도 비포장 도로였고 기주와 두현이가 감기 몸살에 걸려 너무 힘들어 했다. 미쓰사먼 씨의 집에 도착하니 여기도 마찬가지로 개들을 풀어놓고 키우고 있었다. 몇 번 경험했다고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무서웠다. 미쓰사먼 씨네 집에는 해먹이 있었는데 한번 누워보니 너무 편했다. 해먹을 사서 우리 집에 걸어두고 싶었지만 집에 걸어둘 곳이 없다. 날이 덥고 높은 기둥으로 집을 지탱해서 해먹을 많이 걸어두는 것 같았다. 미쓰사먼 씨 집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드디어 우리의 짐이 있는 프놈펜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저녁을 먹어야 했는데 피자를 먹고 싶다는 아이들의 말에 저녁은 피자로 정했다. 수끼를 먹었던 건물에 있는 피자 집에 갔는데 피자 사이즈가 우리나라 레귤러 사이즈보다 더 작은 미니 사이즈였다. 거기다 주문이 잘못 되었는지 많이 먹지 못한 아이들도 많았다. 생각보다 바빴던 캄보디아 일정 때문인지 아픈 아이들이 속출했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를 마무리 하는 모임도 하지 못한 채 각자 잠에 들었다. 캄보디아 마지막 날이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까지는 캄보디아에 너무나 가고 싶었고 기대되었지만 막상 캄보디아에서 시간을 보내니 체력적으로 너무나 힘들어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행기간 동안 처음으로 든 집 생각이었다. 본래 캄보디아 방문 가정은 6가정이었다. 하지만 그 중 소니씨의 집은 우기로 인해 불어난 물에 집이 물에 잠겨 우리가 갈 수도, 가족 분들이 나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캄보디아 도착 전에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만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를 만나러 가족들도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이 캄보디아 우기 때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가족들도, 우리도 서로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소니씨 집 방문은 포기했다.

 

뚜올슬랭 박물관 견학을 마지막으로 캄보디아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프놈펜 공항으로 향했다. 작고 아담했던 프놈펜 공항을 보니 집에 간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하면서 왠지 아쉽기도 하고 시원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몇 번의 공항경험으로 모두 능력자가 되어 수하물도 붙이고 출국 수속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한국으로 향해 출발했다. 이렇게 우리의 여행도 끝이 났다. 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시원섭섭한 마음만이 들었지만 막상 김해공항에 도착하니 모든 것이 반가웠다. 안내판에 있던 한국어도 반가웠고 사방에 있는 한국인들도 반가웠다. 우리를 태우러온 노란색 YMCA버스도 반가웠다. 반가움에 솔비를 챙기지 못했지만 그만큼 집이 그리웠던 것 같다. 우리는 여행의 소중한 추억을 가지고 엄마아빠를 만나러 향했다.

 

이번 여행은 주변의 걱정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나의 여행이었다. 잘 알지 못했던 여러 사람들과 함께한 오랜 여행이었으며 공항이나 여행 중 일어나는 문제를 우리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우리들의 여행이었다.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2학년 이라는 부담감과 많은 고민으로 시작해야 했지만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레 겁먹고 걱정해 여행을 포기했다면 더 큰 후회를 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내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넓은 세계를 알게 되었고, 텔레비전과 신문 등 매체로만 보던 다른 나라의 모습에 내가 너무 갇혀 살았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보고 배웠냐는 질문에 바로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다짐했던 깨끗한 그릇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물어도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면서 사람이나 세계를 보는 시각이 조금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것을 느낀다. 나도 모르게 출발하기 전과 여행을 다녀오고 난 후의 내가 달라져 있음을 아주 많이 느끼고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사람과 소통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좀 더 넓어지고 이전과 다르게 변화했다면 여행을 훌륭하게 마쳤다고 생각한다. 소중하고 건강했던 2014 세계로 여행학교의 기억은 오랫동안 나의 기억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