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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여행학교/제4기 세계로 여행학교

<제4기 세계로여행학교 기행문 ② - 함양고 1학년 황두현>

함양고 1학년 황두현

 

사전교육

 

사실 이 여행을 오기 전까지는 투어회사 에서 만든 프로그램에 따라 그저 몸만 따라가는 여행을 주로 했다. 7번째 외국여행은 조금 특별하게 공정여행을 가게 되었다. 출발 전에 사전교육 때만 해도 미리 겁을 먹고 정말 좁은 차로 정말 낙후된 곳을 찾아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고 출발하는 날에도 무거운 짐 때문에 기분도 좋지 않았고, 몸도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부모님들에게 환송식을 받고 짐을 수하물로 부치고 나서부터는 마음이 편해졌다.

 

 

 

 

 

 

인도네시아

 

우리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정신도 없이 바쁘게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로서로 어색해서 별로 대화는 많이 하지 않았다. 아침을 먹지 않은 채로 비행기를 탔지만 별로 배고픔을 느끼지는 않았다. 3시간 정도의 비행을 통해서 우리는 홍콩공항에 도착했다. 홍콩공항에 도착 했을 때 피곤하기도 하고 비행기에서 잠을 편하게 자지 못했던 까닭에 공항에 있는 의자에 누워서 내내 잠만 잤다. 홍콩에서 첫 식사를 했는데 중국식의 국수 같았다. 그 국수의 맛을 나쁘지는 않았지만 면이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덜 익은 듯했다. 그렇게 밥을 먹고 다시 3시간을 비행기로 달려서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했다. 인도네시아에 처음 도착 했을 때 특이한 향이 났다. 절에서 피우는 향냄새 비슷한 것 이었는데 그 향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한 가지 더 안 사실은 인도네시아가 남반구 국가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계절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다. 그래도 화장실에 물이 우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은 신기했고, 우기가 아닌 건기라는 것도 좋았다.그렇게 공항에서 버스를 탔는데 내예상보다 버스가 너무 좋아서 약간 의아했다. 원래 승합차 같은 곳에 여기저기 구겨져서 타야한다고 생각했던 나로써는 기분이 좋았다.

 

몇 시간정도 버스로 이동한 끝에 새벽에 스완다씨네 집에 도착했다. 처음 집에 도착 했을 때가 밤이라서 집과 마을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유전회사에서 나오는 불길을 보고인도네시아도 산유국이라는 것을 알았다. 스완다씨 에게는 일란성 쌍둥이가 있는데 이름은 스완디이다. 집에 도착한게 새벽3시쯤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오토바이를 동원해서 짐을 날라 주기까지 했다.

인도네시아사람들은 순수하다 그리고 착하고 일을 열심히 한다. 인도네시아는 서양열강의 침략을 오랫동안 받아와서 그런지 순종적이고 여유가 넘친다. 그리고 외국인에게 호의적이다. 말을 못 알아 들어도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끝내 모를 때에는 미소를 짓고 책을 찾아본다. 인도네시아의 가족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도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스마트폰의 보급률이 낮아서 우리처럼 절대 가족끼리 있어도 폰만 보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여기의 가족들은 서로 대화를 많이 해서 그런지 서로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한국은 바쁘게 살기만해서 또 편리함만 쫓다보니 소중하고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놓치며 사는 것 같다. 다시 여행으로 돌아와서 새벽 4시반정도에 가족들이 식사를 대접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인도네시아의 배달음식을 먹었다. ‘나시꾸닝이라는 음식인데 두부튀김과 매운양념이 들어있는 볶음밥에 일종이다. 나시꾸닝을 보고 처음에는 망설였다. 향신료가 강하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을 뒤엎고 맛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보니 인도네시아집 에는 특이한 구조가 있다. 접대실이 있다는 것이다. 접대실은 우리나라의 가옥구조와는 다르게 거실이 되기 전에 접대실이라는 곳에서 손님들을 대접한 뒤 집안으로 모신다. 이런 면 에서인도네시아가 손님을 귀하게 여기는 풍습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는 정수시설이 부족해서 물을 모두 사먹는다. 앏은 플라스틱용기에 담긴 물을 빨대를 꽂아 마시는데 그 부분도 신기했다. 그렇게 밥을 다 먹고 씻은 뒤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5시에 일어나서 신부화장을 하고 각종 여러 의상을 착용했다. 그때 알아차렸다. 보통 행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경찰차의 에스코트까지 받으면서 시청까지 갔고, 그곳에서 1시간정도의 결혼식을 시연했다. 인도네시아 결혼의상의 장점은 화려 하다는 것 하나인 것 같다. 편의성이나 통풍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옷의 구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고문을 받는 듯한 심정으로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인도네시아의 결혼순서는 대략이렇다. 처음에 주례 같은 사람이 이야기를 길게 한다. 그다음에 양가 부모님이 신랑신부를 데리고 마주선다. 그다음에 또다시 주례 같은 사람이 이름과 각종 허락과 약속을 이야기 한 뒤 부모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신랑이 계란을 밟으면 신부가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긴다. 그다음 신부측 아버지가 둘을 데리고 와서 둘 다 무릎에 앉히고 잘살라는 뜻으로 등을 두드린다. 그다음에는 신랑신부가 서로에게 과일을 먹여주고 그리고 양가 부모님들께 허락을 받고 하객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 뒤 사진을 찍고 마무리가 된다. 이 결혼풍습은 정확히 말해 인도네시아 풍습이아니라 자바섬에만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인도네시아의 학교를 방문하고 나서 서자바 지역에 있는 마지막 방문가정으로 향했다. 마지막집은 아스무니씨 집이었는데 아스무니 씨는 인도네시아에서 대학을 나오셨다. 아스무니씨의 꿈은 진주학원 같은 커다란 한국어 학원을 세우는 것인데 일본어와 함께 한국어 실력도 대단해서 꿈의 실현이 어렵지만은 않아 보였다. 아스무니 씨네 집에 도착 했을 때 나는 인도네시아어를 배워 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 집에 있던 기초 한국어 책으로 무작정 가족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초등학교수준의 단어들만 배웠지만 그래도 꽤 많은 단어를 알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인도네시아어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다음 인도네시아의 목적지는 자연사 박물관이었는데 아스무니씨 가족과 함께 가는 여행이 목적이었다. 잊고 있었지만 역사시간에 자바인에 대해서 배운적이 있다. 자바인은 교과서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고 많이 알려진 인종인데 박물관안의 영상과 여러 모형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자바인은 흑인과 비슷한 인종이다. 단 자바인은 동아프리카인 보다 체구가 작고 골반의 위치가 더 아래쪽으로 이동해있다. 그렇게 자연사박물관을 끝으로 아스무니씨 집에 다시 돌아와서 2시간동안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는 아스무니씨의 형의 소개로 동네를 돌아볼 수 있었다. 동네에는 잣과 고추, 벼 등 여러 가지 작물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중에 잣과 땅콩을 따서 줬을 때 처음으로 조리가 되지 않은 땅콩을 먹어보았다. 물론 아리씨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많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끝 맛이 떫어서 많이 먹을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어떤 나무를 소개해줬는데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던 게 후회 된다. 그 나무를 세계에서 알아주는 목재용 나무라는데 기르는데 40만원정도 들고 다 키워서 팔면 그루당 약10에서 20만원까지 이익이 남는다고 했다. 아리씨는 자신도 그 사업을 하고 싶은데 자금이 없다면서 나중에 다시 돌아 올 때 생각좀 해보라고 권유까지 해주었다. 말만 조금 통하고 돈만조금 있다면 시도 해보고 싶은 사업 아이템이었다. 그렇게 아스무니씨 집에서 가족들의 눈물의 환송을 받고 밤새 달려 발리로 향했다.

다음날 우리의 원래 계획은 해변가에서 조금 둘러만 보고 사원에 가서 원숭이들을 보는 것이었는데 계획을 갑자기 바꾸었다. 이왕 발리까지 온 거 수영을 해보자는 일념으로 모두 바다에 들어갔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 한 것이 있었다. 살이 타도록 그저 놓아 둔 것이다. 모두들 조금씩 탔지만 내가 제일 심하게 탔다. 이때 탄 것 때문에 다음 4~5일을 고생했다. 그렇게 인도네시아는 발리를 마지막으로 그날 바로 말레이시아로 우리는 향했다. 여기서 잠깐 인도네시아어에 대해 소개를 하자면 우선 인도네시아어는 표기를 영어로 하기 때문에 읽기에는 커다란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어순은 영어와 같다. 인도네시아어는 말레이어에서 파생 되어 나온 일종의 방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어는 각 지방마다 언어가 달라서 그 점도 유의해야 한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다시 여행이야기로 돌아와서 말레이시아라고 하면 경제규모가 도움 받을 수준은 아니다. 세종시의 모티프가 푸트라자야라는 말레이시아 도시라는 것을 감안해보면 90년대 까지만 해도 말레이시아는 우리나라보다 선진국이었고 지금도 도시지역은 매우 잘 발달 되어있다. 말레이시아 방문목적은 난민에 대해서 알고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자는 것이었다. 말레이시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난민의 수는 줄지 않고 늘어가고만 있다. 다행스럽게도 국제 난민법이 이른 시간 안에 제정되어 난민심사에서 난민 판정을 받으면 생활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으로 지원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힐라학교의 난민들은 조금 사정이 다르다. 힐라학교 교장선생님인 한국인 김에녹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셨을 때 이 사람들이 분명히 목숨을 담보로 국경을 넘어서 왔는데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건지 화가 나기도 했다. 아버지가 난민 신청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수상하면 체포를 하고 풀어주지를 않는다고 한다. 가족들은 면회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면회를 하러 가면 가족들도 모조리 잡힐 테니까.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난민들이 살아간다. 그래도 처음 그 아이들의 표정을 밝았다.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공부하기 싫어했고, 교육에 대해서 안일하게 생각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보잘 것 없는 이면지에 적힌 수학문제라도 열심히 풀어내는 아이들을 보고 말이다. 누구는 없어서 못받는 고등교육을 나는 무슨 자격이 있다고 받는 건지, 단지 잘사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쩌면 운이 좋았기 때문에 그 행운으로 받은 기회를 남을 위해 써야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크게 반성하고 나서 정신차려 보니 이미 캄보디아행 비행기를 탈시간이 되었다. 사실 그날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서 비행기가 결항 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걱정을 무시해 버린 채 비행기는 너무나도 정상적이게 우리는 캄보디아로 실어주었다.

 

 

캄보디아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캄보디아의 모습은 참담했다. 제대로 된 도로가 없을 정도로 물에 잠겨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우리가 너무 편하게 지내서 캄보디아도 당연히 그럴 줄로만 예상했던 우리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공항에서 나와서 우리를 태우러온 타를 보고는 더욱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미 지치기도 했고, 비행기도 타서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좁은 차에서 여러 불평과 불만들이 오갔다. 그래도 그날 밤에 수끼로 나름 포식을 하고 방에 모여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몇 시간을 달리는 강행군을 했다. 캄보디아 일정은 융통성이 돋보였는데 원래는 첫날 세집을 가는 거였는데 중간에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길 위에서 5시간을 허비했다. 그래서 2집만을 방문했다. 이날 내 파트너인 소폰씨 집에 방문했는데 소폰씨 집은 전자제품을 파는 전파상 같은 집이었고 집도 다른 집들에 비해서 잘사는 수준이었다.

 

 

 

그 집에서도 각종 고기들로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잤는데 이날이 문제였다. 이날 일정이 빡빡하기도 했고,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고 잤기 때문에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다음날 일어나는데 몸이 많이 무거워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그날 오전을 모두 쉬는데 투자해야만 했다. 여기서 끝났다면 좋으련만 식사하고 차를 탔는데 도저히 참을 수준을 넘어서서 결국 제일 뒷자리에 누워서 쉬기로 했다. 결코 누워있다고 편하지는 않았다. 열이 정말 높았다. 물수건도 전혀 소용이 없었고, 그저 끙끙 앓고 차에 실려 가는 꼴이었다. 마지막에 아파서 더욱 아쉬웠다. 그렇게 정신없이 앓고 나니 이미 게스트하우스로 도착해 있었다. 몸살에서 제일 힘들게 했던 것은 가만히 있어도 아픈 것 이였다. 가만히 있으면 안 아프기라도 해야 견딜 만할 텐데 그것마저 아니니까 정말 괴로웠다. 마지막 날도 무리하지 말라는 배려로 숙소에 남아서 기다렸다. 그렇게 약간 아쉬움을 남긴 채로 캄보디아에서 홍콩행 비행기를 탈수밖에 없었다.

 

몇 시간의 비행 끝에 한국으로 왔을 때 아무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서 머리가 과부하가 걸려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번여행은 나를 반성하고 직업에 대해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해 준 것 같다. 사실 한국 내에서만 직업을 찾으려고 하기에는 세상에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특히 말레이시아에 한 한인기업에서 들었던 이야기인데 한국사람의 재능과 두뇌 그리고 학력은 세계어디에 내놓아도 뒤쳐질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고 들었다. 사실 그렇다. 하루에 14시간이상 공부하는 인재가 세상에 흔하지 않다. 그래서 더욱 영어나 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해서 세계적인 직업을 가지려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이런 경험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