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중3 김민철
-사전교육-
이번에 인도네시아를 6일간 직접 경험하면서 정말 많은 일을 겪었고, 많은 것을 느꼈다. 인도네시아에 오기 전부터 색다르고 특별한 만남을 여행학교 멤버들과 가졌지만, 이번 인도네시아에서 경험한 일들이 더 값지고, 힘들고, 기억에 남는다. 그때 그 감동과 즐거움 그리고 교훈을 모두 글로 담지는 못하겠지만, 짧게나마 적어보려 한다.
우선 국내에서 받았던 여러 교육 중에서는 공정여행에 대한 교육과 이주노동자들과의 직접 만남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공정여행은 내가 그동안 가족, 친구들과 다녔던 패키지여행과는 다르다. 처음에는 이번 세계로 여행학교도 여타 패키지여행들과 다를 바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설명회와 연수를 통한 공정여행에 대한 이해는 나에게 다른 문화,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비록 아직까지도 그런 것들을 존중하는 법을 다 깨닫지 못했지만, 공정여행을 직접 해봄으로써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우리가 매일 입으로, 글로만 해왔던 환경보전을 인도네시아에서는 샴푸대신 비누로 머리를 감고, 양변기 대신 인도네시아 변기로 물을 아껴 몸소 실천했다. 또한 그동안 더럽거나 불쌍하다고 여기던 인도네시아 소년과 몸을 맞대고 놀았고, 같이 손으로 밥을 먹었다. 옆에 있는 변기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를 참고 바가지로 물을 퍼서 샤워도 했다. 이처럼 지구와 환경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배우는 것을 공정여행이라고 한다.
또 다른 국내교육 중 재미있었던 것은 이주노동자들과의 만남과 친구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맨 처음 교육이었던 액션러닝 시간에 불참했기 때문에 두 번째 교육부터 참가했는데, 첫 만남엔 모두 어색했지만, 나름 발표도 열심히 하면서 나의 색깔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 다음 시간부터 다들 서로서로 말도 걸며 조금씩 친해진 것 같다. 이주민과의 만남 시간은 아주 색달랐다. 그것이 우리 여행학교의 진짜 워밍업이었는데, 경남 과기대 김창완 교수님이 외국인과의 대화를 도와주셨다. 나의 짝꿍이었던 사리스(Sarith)씨는 캄보디아에서 오신 분이었는데, 조금 낯은 가리고 내성적이어도 착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한국을 떠날 때야 알게 된 사실인데 사리스씨는 영상을 찍지 않는 분이셨는데, 설명을 잘못 이해하고 나와 활동을 했다. (결국 나중 나의 파트너는 로반나 씨로 바뀌게 된다. 마찬가지로 캄보디아 분이셨는데, 한국말을 아주 잘하셨다.) 하여튼 외국인과 같이 웃고 떠드는 시간을 가지고 나니까 그들의 사연과 속마음 깊은 곳이 이해가 되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그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먼 타국에 와서 힘들게, 외롭게 일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직장내에서의 폭력, 불평들과 같은 그들이 감내하고 있는 고통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교육 마지막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최대 4년 10개월 밖에 일하지 못한다. 처음 3년을 일할 수 있고, 다시 재계약을 체결해서 1년10개월을 더 일할 수 있게 된다. 그러고는 한국을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야 한다. 물론 일을 하기 위해선 한국 땅은 다시는 밟을 수 없다. 그러한 어려움들을 알고 나니 여행학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인도네시아-
출발 준비를 마친 우리는 간단한 송별식 후에 새벽 12시10분에 차를 타고 인천공항을 향해 진주를 떠났다. 진짜 떠난다고 생각하니 앞에 닥칠 어려움보다는 그저 외국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다. 차 맨 뒤에 탄 남자 3명중 희찬이는 꾸벅꾸벅 잠만 잤고, 현빈이와 나는 떠들었다. 중간 중간 휴게소 몇 개를 들르면서 달리다보니 오전 4시 35분에 인천 공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정말 차안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는데, 그래도 왠지 피곤하지가 않았다. 공항 안은 새벽이어서 그런지 매우 조용했다. 또 외국인보다는 한국인이 아직 많아서 외국을 나간다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조용한 가운데 우리는 짐을 잠시 정리하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앉아 쉰 뒤 7시쯤 달러를 루피아로 환전했다. 40달러를 환전하니 35만 루피아를 받았는데, 돈의 단위가 커서 좀 놀랬고, 그 나라의 경제규모가 대충 감이 왔다. 그러곤 식사담당이었던 서현이 누나가 고른 아침메뉴인 맥도날드 햄버거로 아침을 해결하고, 선생님들의 인솔로 가방 보딩과 수속을 쉽게 해결했다. 선생님들의 공항에서의 도움은 인천공항이 마지막이라고 하니 후에 홍콩에서의 내 인솔과정이 걱정되었다. 드디어 10시 50분에 꿈과 기대를 담은 비행기는 한국 땅위로 날았고, 신기하게 창밖을 구경하다보니 오후 2시30분에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홍콩에서의 공항 인솔 담당은 지원이와 나였는데, 현빈이와 나로 바뀌었다.(현빈이가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흔쾌히 수락하셨다.) 우리는 한참을 헤맸지만, 둘이 힘을 합쳐 친절한 외국인들에게 길을 물어 결국 11명 전원을 공항 수속까지 마쳤다. 사실 알고 보니 홍콩에서의 환승과정은 매우 쉬운 것이었다. 게이트에서 우리는 허빈 선생님이 사주신 음료수를 마시고 5시 20분에 비행기를 탔다. 항공사 이름이 기억나는데, 캐세이 퍼시픽이었다. 비행기에 앉아서 홍콩에서 인솔한 과정을 다시 생각해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청소부 아줌마께도 여쭤보고, 휴식 중인 스튜어디스와 안내데스크 직원에게도 물어보고, 정말이지 힘들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만난 모두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오롯이 우리의 힘으로만 공항에서 전원을 비행기를 태웠다는 것이 대견하기도 했다. 잠깐 멀미도 하고 이상기류를 만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오후 9시50분에 드디어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 도착했다.
짐을 내리고, 졸리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는 생각보다 혹독한 목사님의 말을 들었다. 짐 찾기, 수속, 버스 탑승 과정까지 피로와 짜증에 물들어 있던 우리는 오후 11시30분에 버스를 탔고, 첫 번째 목적지인 인드라마유에 있는 피흐리 씨의 집으로 갔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새롭게 8월 6일의 아침을 맞은 우리는 휴게소에 들러 처음으로 ‘유료 화장실’을 사용했다. 소변이 2000루피아를 내야하는데, 그때 처음 인도네시아의 화장실 상태를 파악했다. 다시 덜컹덜컹거리며 비포장과 포장도로를 오가면서도 우리는 차안에서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이때부터 고등학생 누나들과 조금씩 친해졌다.
피흐리 씨의 집에 도착해서 나는 나의 담당인 촬영 보조 역할을 하며 열심히 심부름을 했다. 역시 처음하다 보니 어리벙벙하게 목사님과 호흡도 안 맞고 그랬다. 처음 보여주는 영상편지다 보니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피흐리 씨의 가족은 옹기종기 모여 우리에게는 진귀한(그곳에서는 최고의 대접)음식을 차려주었고, 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스크린에 비친 아들의 모습을 보며 아들이 바로 앞에 있는 듯 손짓을 하고 눈물을 보이는 가족의 모습은 나를 피곤한 와중에도 마음 짠하게 만들었다. 영상을 다 보여주고 재촬영에 들어갈 때, 우리는 어수선한 동네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주민들과 같이 사진을 찍고, 아이들에게 풍선을 불어 칼과 강아지를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거기서 인도네시아에도 예쁜 여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촬영이 끝난 후 피흐리 씨 가족이 차려준 아침 겸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닭 요리가 정말로 맛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치킨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대충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은 뒤 모든 이와 작별인사를 하고, 오후 1시에 마을을 떠나 2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버스를 타는 긴 시간은 아직 적응하기 어려웠다. 기사님도 길을 잘 모르셔서 유턴에 또 유턴을 해서 겨우겨우 수립도 씨의 집을 찾아 오후 5시 30분에 수립도 씨의 집에 도착했다. 수립도 씨에게는 영상을 전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수립도 씨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립도 씨는 오랜 준비기간과 많은 돈과 노력을 들여서 겨우 한국에 일 하기 위해 들어 왔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고 동료였던 한국인 노동자에게 계속 구타와 갖은 폭력을 당했고, 결국 바다에 빠트려 질 뻔했던 위기를 겪고 트라우마가 생겨서 한국에서 일 한지 1달 반 만에 직장을 포기했고, 목사님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수립도 씨의 집에 방문한 이유는 나쁜 한국인을 대신해서 사죄하고, 한국에는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간단히 음료를 먹은 뒤에 동네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어림잡아 70여명의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눠주었다. 풍선이 모자라서 모두에게 주진 못했지만, 힘닿는 한에서 정말 많은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누어 주었고, 노력했다. 다행히 손에 풍선을 집은 아이와 그 옆에서 같이 노는 친구들, 그리고 아이들의 어머니, 할머니들은 모두모두 행복한 얼굴이었고, 한국에 대한 좋은 인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몸은 힘들고 찝찝했지만 마음은 보람찼고 재밌었다. 샤워를 시원하게 한 뒤에 다시 차에 탔다.
오후 8시 정도에 출발했는데 다음 목적지가 꽤나 멀리 있어서 밤새 달렸다. 처음에는 간단한 게임을 하고 노래도 불렀지만, 이내 피곤했는지 모두가 잠들었다. 불편한 자리 때문에 자다 깨다 자다 깨다 하다 보니 ‘야니’라는 분이 운영하시는 ‘진주학원’에 도착했다. 야니 씨는 10여년 전에 한국에서 일하시던 여느 평범한 이주 노동자였는데, 이정기 목사님께 한국어를 배우고 인도네시아에 돌아가서 진주학원을 여셨다. 진주학원은 한국으로 오기위한 준비를 하는 곳인데, 한국어를 배우고 문화를 배운다. 매우 늦은 시각이었음에도 야니 씨와 가족들은 우리를 마중하기 위해 나와 계셨다. 피곤했던 우리는 짐을 풀고 발만 대충 씻고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보니, 전날 모기향을 피운 덕분인지 모기에는 별로 물리지 않았고, 조금 피곤한 것 외에는 괜찮은 8월 7일 아침 이었다. 세수를 하고 야니 가족에게 인사를 드렸다. 역시 한국어 학원 원장님이라 그런지 정말 한국어를 잘하셨다. 어휘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여하튼 아침은 다같이 9시에 카레를 먹었다. 나는 원래 카레를 좋아해서 잘 먹었지만, 희찬이는 카레를 싫어해서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결국 목사님의 꾸중을 듣고 먹었다.
그러곤 나가서 우리의 일정 중 하나인 국제교류 파트너들을 만났다. 다들 인도네시아의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15~17세의 학생이었다. 껀달 지방교육장님도 오셔서 한 말씀 해주시고 갔는데, 그 때문인지 방송카메라가 와서 괜히 나도 조금 진지해졌다. 인도네시아 말이라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중간 중간 조크도 하시는 위트 있는 분이셨다. 시간 관계상 말씀 뒤에 우리와 사진 한 장 찍으시고 가셨다. 다음 차례는 우리가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짧은 영어지만 자신 있게 나를 소개했다. 다들 몇 마디씩 하고 다음에는 인도네시아 친구들이 자기소개를 했는데,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정말로 발음도 좋고 잘했다. 나의 짝꿍은 까르티나와 띠안나였다. 예쁘고 센스있는 학생들이었는데, 영어가 전혀 안돼서 결국 사진만 계속 찍었다. 그러다가 영어를 잘하는 학생이 의사소통을 도와줬는데, 사귀자는 식의 농담을 했다. 짧은 대화 이후에 탈 그리기 활동을 했다. 둘 다 아주 예쁜 탈을 만들었다. 신기했던 것은 외국인이 우리나라의 전통 하회탈을 칠하는데도 다채로운 색감이 한국의 탈과 매우 비슷하게 칠해졌다. 카르티나는 탈의 눈썹에 피어싱을 하고 입술에 립스틱을 발라서 조금 웃겼다.
활동 뒤에는 인스턴트 강된장과 밥을 비벼먹고, 수영장으로 갔다. 차를 타고 가면서 중간에 ‘SMK5’라는 학교를 들러 견학을 했다. 공학 학교였는데, 학교가 넓고 깔끔했다. 또 그 고장에서는 매일매일 수상을 하는 명문학교였다. SMK5 외에도 1,2,3,4가 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는 정말 수영장으로 향했다. 작은 풀장이었는데 그곳에서 외국 친구들과 수구를 했다. 내가 백다이빙을 보여주니 현빈이가 신기하다고 했다. 즐겁게 수구를 했는데 졌다. 하지만 재밌게 논 것이 전부라 절대로 아쉽지 않았다. 그렇게 신나게 놀고 나서 젖은 옷을 입고 친구들과 밥을 같이 먹으러 갔다. 멀리 가진 못하고 근처의 식당에 갔는데, 손으로 밥을 먹었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렇게 밥을 먹고 몇 명은 우리와 같이 차를 타고 우리가 데려다 주었다. 그때가 인도네시아의 명절 바로 전날이었는데, 차를 타고 가는 밤길에 폭죽을 엄청 쏘아서 우리는 열심히 구경했다. 가는 동안 무서운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서현이 누나가 제일 잘했고, 리액션은 혜지 누나가 제일 웃겼다.
다시 진주학원에 도착해서 잠깐 회의를 했다. 우리의 일정 변경에 대한 회의였는데, 원래 본래 일정대로라면 우리는 내일 새벽 일어나서 차를 타고 오랜 시간을 달린 뒤에 브루모 화산이라는 곳을 가야한다. 가서 등산을 하고 말을 타는 경험을 해본 다음에 다시 차를 타고 밤방이라는 분의 영상을 전달하기 위해 가야하는데, 이 일정을 소화하고 나면 수영장에 갔다 온 우리가 병을 얻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회의를 거친 뒤에 투표를 해서 브루모 화산을 가는 대신, 휴식과 남은 빨래를 정리해서 더욱 힘을 내서 밤방 씨 집에 바로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결정이 되었고 우리는 좋아했다. 그리고 목사님이나 간사님이 그냥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의 충분한 회의 뒤에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참 좋았다. 그것이 공정여행의 또 다른 의미 아닐까. 이제 잘 준비를 하는데 소년 2명이 와서 우리에게 폭죽을 권했다. 내가 하긴 겁나고 구경이나 했는데 멋있기는 해도 정말 잘못하면 손목 날아가지 싶었다. 그리고 자기 전에 쥐가 나와서 여자애들이 난리치는 소동 후에 누나들과 장난 좀 치고 난 다음에 희찬이와 웃긴 이야기를 하다가 잤다.
8월 8일 아침에는 늦게 일어나서 다 마른 빨래를 챙기고 짐을 정리한 뒤에 아침에 다 같이 컵라면을 먹었다. 결국 들고 온 컵라면은 우리가 어제 밤에 먹은 것까지 다 합쳐서 싹 먹어 해치웠다. 밥을 먹고 앉아서 야니 원장님과 간단한 작별인사를 하고 오후 2시에 차를 타고 밤방씨 집으로 향했다. 밤방씨 집은 자바 섬 중부에 있는 껀달, 즉 우리의 현재 위치와는 상당히 먼 자바 섬 남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 쉬지 않고 달려 저녁 쯤에 밤방 씨 집에 도착했다. 영상을 전달하는 장비를 준비하는 일이 이제 좀 손에 익어서 밤방 씨 집에서는 빨리빨리 해결했다. 역시나 영상을 본 가족들은 처음부터 눈물을 흘렸다. 여러 번 본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나온 밥을 먹고서는 하늘에 있는 별을 봤는데 한국보다 훨씬 더 많았고 아름다웠다. 남반구인 인도네시아에는 북반구인 우리나라와는 관측할 수 있는 별이 분명히 다를 텐데도 바보같이 우리는 북극성을 찾았다고 좋아했다. 밤방 씨의 가족과도 이제 작별인사를 했고, 인도네시아에서의 영상편지 전달은 모두 끝이 났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우리가 염원했던 발리였다. 밤이 되어 차에 타서 정말 밤새 달렸다. 불편한 자리에는 아직 적응하지 못했고, 계속 자다가 깨서 자세를 고치느라 정말로 애먹었다. 8월 9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발리로 가는 항구 바로 앞의 식당에 도착해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고, 아침으로는 볶음밥을 먹었다. 볶음밥은 인도네시아 말로는 ‘나시 고랭’인데, 나시는 밥, 고랭은 볶음을 뜻한다. 나는 해물이 들어간 볶음밥을 먹었는데, 의외로 입에 잘 맞아 좋았다. 그리고 작은 땡초를 먹고 음료수 한 병을 다 비워서 다 웃었다.
배를 타기 위해 항구로 갔다. 물길이 좁아 물살이 강하기 때문에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떠내려가는 형태로 갔는데, 그래도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렸다. 배 위로 올라가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사진을 찍으니까 정말로 발리에 가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드디어 배에서 내리고, 우리는 발리에 도착했다. 발리는 신혼여행으로 오지 않는 이상 아마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눈에 더 많은 것을 담으려 했다. 일단 간단히 사원 하나만 갔다가 숙소로 가기로 했다. 사원에는 멋진 정자가 있었는데, 밀물이 들어오면 길이 없어져 작은 섬처럼 되지만, 썰물 때는 다시 평범한 언덕이 되는 재밌는 정자였다. 우리 남자들은 물수제비를 했고 여자들은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사원을 구경하고 군 옥수수를 사먹은 다음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호텔이었는데, 관광차 온 발리에서는 좋은 곳에서 자자는 선생님들의 배려였다. 호텔이름은 아리랑이었다. 한국분이 운영하는 호텔이었고, 호텔 식당에는 한국 음식을 팔았다. 그리고 무려 실외 수영장도 있었다! 모두 새벽까지 수영하고 놀다가 tv좀 보고, 잠을 잤다.
8월 10일 오전 10시에 상당히 늦게 일어나 아침으로는 오믈렛을 먹고, 쇼핑몰에 갔다. 가서 친구들 몇 개 나눠주고 나도 하기 위해서 팔찌를 여러 개 샀고, 할머니 선물로는 보조가방을, 아빠에겐 선글라스를, 엄마에겐 머그컵을 샀다. 그러고는 발리에서 꽤 유명한 해변가의 사원으로 향했다.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이 탈출하기 위해 몸을 바다에 던지는 장면을 찍은 절벽으로 매우 유명한데, 실제로 보니 파도 부서지는 소리와 어우러져 멋있었다. 그곳에는 아주 짓궂은 원숭이들이 살았는데, 사람의 물건을 뺐아 가는 것을 좋아해서 안경, 모자, 목걸이 등을 훔쳐간다. 그래서 사원 내에 원숭이를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한국어로까지 적혀 있었다. 그렇게 사진 여러 장을 찍고 원숭이들과 놀다보니 저녁이 되었고, 우리는 발리에서 정말정말 유명한 식당인 ‘짐바란’ 이란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해변가에서 바다를 보며 밥을 먹을 수 있는 정말로 분위기 좋은 식당이여서 음식을 더 맛있게 먹었던 것 같다. 물론 가격은 정말 비쌌다. 하지만 발리 갔다면 그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되지 않을까, 하고 잠시 공정여행의 의미를 까먹었었다. 나는 양치도구를 잃어버려 급한 대로 아리랑에 가던 길에 편의점에서 칫솔을 샀는데, 여행이 끝날 때 까지 잘 썼다. 그렇게 아리랑에 도착해서 기행문을 쓰고 다음 날 아침에 오전 4시에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그냥 누나들과 밤을 샜다.
인도네시아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발리에서 마무리 짓고, 오전 4시 30분에 발리 공항으로 갔다. 졸린 눈을 비비며 수속을 하고 짐을 나르는데, 새벽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고 붐비지 않았다. 짐 나르는 데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하마터면 비행기를 놓칠 뻔한 우리는 허둥지둥 비행기를 타서 자리에 앉았다. 짐을 들고 타다보니 역시 불편했다. 짐을 짐칸에 넣고 밤에 못잔 잠을 보충했다. 한숨 자고 개운한 정신으로 9시 35분에 말레이시아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도착했다. 그 곳의 인솔 담당인 태연이와 지원이(원래는 나와 같이 홍콩 인솔 담당이었지만, 현빈이와 교체 되었다.)가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둘 다 중학교 1학년으로 막내들이었지만, 고학년 못지않은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환승을 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비행기로 갈아타는 과정이어서 잠시 헤매기도 했다. 결국 마지막에 목사님이 약간의 도움을 줘서 수속을 완료했다. 오전 11시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로 아침을 해결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게이트로 이동했다. 그곳 게이트에서 너무 졸려 한 시간 정도 졸다가 2시 50분에 이제 프놈펜 행 비행기에 탔다. 우리의 두 번째 주 목적지인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니 이제 여행이 막바지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6일간 겪었던 일들과 추억을 되새기며 잠시 눈을 붙였다. 잠시 졸다 일어나서 비자 관련 서류를 작성했는데, 이미 홍콩에서 자카르타로 갈 적에 한번 작성해 봐서 이제는 항공편명도 쉽게 쉽게 찾고 수월했다.
4시에 프놈펜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려서, 꽤나 긴 수속과정 뒤에 공항을 빠져나와서 우리의 캄보디아에서의 버스에 짐을 싣고 탔다. 버스를 찾아다니면서 어떤 게 우리 차일까 하고 궁금했는데, 인도네시아에서 타던 것보다 커서 좋았다. 버스를 타기 전 우리는 공항에서 김기대 선교사님을 처음으로 뵈었는데, 2000년, 즉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동물병원 의사셨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캄보디아로 넘어 오신 분이다. 선교사이기도 하며, 적정기술 연구원이기도 하시다. 한 번 사는 인생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남을 도울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오셨다고 했다. 덧붙이는 말 중에 멋진 말이 있었는데, 우리는 캄보디아를 흔히 ‘킬링필드’라고 부른다. 크메르루즈 시절 아픈 역사와 고통을 가진 이 캄보디아 땅을 죽음의 땅, 즉 킬링필드라고 부르는데, 이 땅을 치유의 땅, 힐링필드로 바꾸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숙소에 6시에 도착했는데, 선교사님들이 머무시는 전용 게스트 하우스였다. 내부는 깨끗하고 깔끔했고 양변기에 샤워기까지 있어서 우리는 기뻐서 날뛰었다. 짐을 풀고 나서는 캄보디아 전통음식중 하나인 수끼(SUKI)를 먹으러 갔는데, 우리나라의 샤브샤브 정도 되는 음식이다. 가서 직접 해먹는 맛도 있고 코스요리 식으로 나와서 맛있었다. 배부르게 저녁을 해결 하고 나서는 내일 8월 12일의 힘든 일정을 위해서 일찍 호텔에 들어갔다. 저녁에 잠깐 모이는 시간에 우리 층에 잘생긴 캄보디아 형이 나왔는데, 이름은 나릇이라고 했다. 나릇 형은 캄보디아에서 공부하고 있는 20살 된 대학생이다. 캄보디아에서는 만약 초등학교 입학생이 100명이라고 하면 그 중에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사람은 2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김기래 선교사님 같은 분들이 캄보디아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노력하셔서 이 땅의 청년들을 대학교에 보내고 계몽 하시고 있다. 나릇 형도 그러한 혜택을 받고 있는 형 중에 하나였다. 영어와 캄보디아어(크메르어)를 동시에 할 줄 아는, 우리 무리의 유일한 사람 이였기 때문에 우리와 동행해서 영상편지를 찍는 것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나릇 형과 짧은 인사를 하고는 방에 들어가서 잤다.
8월 12일 월요일 아침에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매우 일찍 기상을 했고, 쌀국수 집에 가서 쌀국수와 볶음밥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기사님과 선교사님 두 명을 포함해서 14명이 밥을 먹었는데도 25달러, 한화로 약 27,000원 정도 밖에 안 나왔다고 간사님이 말씀 해주셨다. 그때 캄보디아의 돈 가치에 대한 감이 왔다. 우리나라에서 가끔 밥을 비싸게 먹을 때는 한 명당 식비가 3만원 정도 지불할 때가 있는데, 여기서는 3만원으로 15명이 맛있고 풍족한 아침을 해결할 수 있었다.
무려 4집이나 방문하기 위해 길을 달렸고, 메콩 강 입구에 도착했다. 메콩 강 입구에서 배를 타기 위해 잠깐 차에서 내린 우리는 캄보디아에서 처음으로 구걸하는 아이들을 만났다. 나는 하늘이가 도저히 기부를 못하겠다고 해서 1달러를 가장 키가 작은 아이에게 주었다. 그러니 옆에 있던 아이들이 심술이 났는지 괜히 아무 죄 없는 현빈이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장난을 치는지 싸움을 하는지 툭툭 치다가 배가 도착해서 배에 탔다. 구걸하던 아이들도 배에 탔는데,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하느라 바빠서 우리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꽤나 짓궂은 아이들이었다. 메콩 강은 캄보디아의 땅을 기름지게 하는 생명의 강이다. 강물의 색은 더럽지만, 그 황토물이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농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캄보디아 사람들은 논농사를 많이 했고, 벼를 길렀다. 메콩 강을 건너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강을 건넌 우리는 차로 다시 이동했다. 어제 (일요일) 밤에 비가 왔었기 때문에, 비포장도로는 질척거릴 뿐만 아니라 심각하게 흔들렸다. 인도네시아에서 포장도로를 달리며 어지럽다고 찡찡대던 것이 후회되었다. 그렇게 덜컹덜컹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데, 소와 돼지 같은 가축을 보았고, 넓은 들판들을 보았다.
캄보디아에서의 첫 번째 방문 집은 미앗사먼 씨의 집이었는데, 예상 시간보다 2시간이나 더 걸린 오전 11시에 미앗사먼 씨의 집에 도착했다. 미앗사먼의 아버지가 우리를 마중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나와 계셨고, 나는 빔프로젝트와 노트북이 담긴 하드케이스를 들고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 재밌었던 것 같다. 미앗사먼씨의 아버지는 매우 호탕하고 목소리가 큰 분이셨는데, 밝은 성격의 소유자이시다 보니 아들의 영상 편지를 보고도 내내 즐거운 듯 미소를 지으셨다. 물론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밝은 모습 보여주시니 괜스레 내 마음도 기뻤다. 영상 편지를 보여주고 재촬영 시간 뒤에, 그곳에서 차려주시는 밥을 맛있게 먹고, 오후 1시쯤에 작별 인사를 했는데, 다시 차를 타려니 차가 정말로 뜨겁게 데워져 있었다. 기사님이 센스 있게 그늘에 세워 놓으셨으니 망정이지 땡볕 아래 차가 세워져 있었다면 정말로 쪄 죽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2시간 이상 지체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느리지만 최대 속력으로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출발한지 1시간 정도 되었을 때,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스콜이라고 불리는 열대 우림지역 소나기가 내렸는데, 빗줄기도 강하고 비의 양도 많았다. 질척이는 길 때문에 우리는 또 예상 도착시간을 넘어서 두 번째 집인 속홈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집에서 처음 알았는데, 나만 느낀 것이진 모르겠지만 왠지 인도네시아 사람들보다 캄보디아 사람들이 눈물을 적게 흘렸다. 그저 묵묵하고 담담히 영상을 보았고 촬영 때도 시종일관 밝은 모습, 또는 무뚝뚝한 모습으로 촬영을 했다. 내 느낌에서 비롯된 잘못된 상상일지 몰라도 느낌은 그랬다. 빠른 진행을 위해서 영상을 보여주고 촬영을 한 뒤 바로 다음 집인 넹 비스나 씨의 집으로 향했다. 그 때까지 계속 내리던 비는 웅덩이를 많이 만들었고, 몇 시간 동안 웅덩이를 잘 피해오던 우리 차는 결국 바퀴가 빠져버렸다. 우리는 근처 오두막 밑에서 구경하고 목사님과 간사님, 나릇 형이 차를 뺀다고 용을 쓰셨지만 안 빼져서 결국 내가 현빈이를 데리고 가서 차를 빼냈다. 잘했다고 칭찬받으니 기분은 좋았지만, 그때 비를 맞았던 사람들 전원은 다음 날 다른 사람들 보다 몸이 좋지 않았다. 특히 나릇 형은 사실 오늘 병을 얻어서 쭉 아팠다. 그렇게 시간은 지연되고 지연되어 넹 비스나 씨의 집에 갈 때 결국 밤이 되었다. 그곳에서 영상 전달을 마치고 컵라면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그리고 넹 비스나 씨의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캄보디아의 인사는 두 손을 모아 합장자세로 만들고 높이는 턱 위, 코 정도에 놔두고, 만나서는 ‘줌무립쑤어’, 헤어질 때는 ‘줌무립리어’라고 말하면 된다. 합장한 손의 위치에 따라 존경의 정도 달라지는데, 가슴 정도는 친구들끼리 만나서 반가울 때 하는 정도고, 적어도 턱 높이 정도는 되어야 존중의 인사다. 코 위로 손이 올라가면 왕이나 신에게 바치는 인사가 되는 것인데, 사실 올려도 상관없다. 대신 손이 내려간다면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뵙는 어르신께 버릇없이 반말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세 번째 이후에 네 번째 집인 로반나씨, 나의 담당파트너 집에 갔어야 했지만, 시간도 늦었고 비를 맞은 우리가 아플 위험도 있어서 속히 호텔로 갔다. 밤에 회의 시간에 모여 우리는 변경된 일정을 들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월요일 4집, 화요일 4집, 수요일 1집을 방문 했어야 했지만, 오늘 일정의 로반나씨 집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로반나씨의 집은 방문대신에 로반나의 형과 아침에 잠깐 목사님이 만나셔서 영상과 선물을 전달하기로 하고, 화요일은 4집 그대로 정상진행 하기로 했다. 그렇게 변경된 일정을 공지받은 우리는 방에 들어가서 씻고 제대로 빨래를 한 뒤, 다들 모여서 놀이도 하고 이야기도 하다가 조금 늦은 시간에 잤다.
8월 13일 역시 바쁜 일정 소화를 위해 매우 일찍 일어나서 어제와 똑같은 메뉴의 밥을 먹었고, 서둘러 여러 집들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런데 출발할 때부터 나릇 형이 아프다고 했다. 어제 저녁부터 몸이 안 좋았는데, 비를 맞고 감기 몸살에 심하게 걸린 듯 했다. 그래도 아픈 몸을 이끌고 나릇형은 우리를 따라 나섰고, 우리는 어제와 똑같은 메뉴로 아침을 해결했다. 오늘의 일정중 두 집은 프놈펜 안에 있는 집이었기 때문에 4집 방문의 일정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출발하고 나서 보니 이민가방(이민가방이라고 부르던 우리의 아주 큰 공동짐 가방이 있다.) 안에 우리의 스케치북이 없었다. 스케치북에는 캄보디아말로 적힌 우리에 대한 소개와 우리의 방문 목적이 적혀있어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결국 아무리 찾아도 스케치북이 없어 잃어버린 것으로 판명되자 짐 담당이었던 혜지 누나는 목사님께 꾸중을 들었다. 개인 담당 직무를 충분히 이행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혜지 누나가 혼이 나고 또 영상 촬영 중간에 태연이가 좀 떠들어서 태연이도 혼이 났다.
세 번째 방문집인 린라니씨의 집은 정말로 형편이 어려웠다. 아마 우리가 방문했던 집 모두를 통틀어서 가장 어려운 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나라의 쪽방촌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었다. 대충 나무 판자 몇 개를 받쳐서 집 형태로 만들어 살고 있었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집 중에 하나라서 노트북으로만 영상을 전달했다. 그때 우리 모두는 피곤하고 짜증나있는 상태여서 밖에서 기다리다가 빨리 차에 탔다.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집인 이어잔랏 씨의 집에 방문해서 우리는 영상을 전달한 뒤에 맛있는 저녁을 먹었고, 나는 들고 간 선물인 볼펜과 머리핀 등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8월 14일 수요일 아침에는 비교적 덜 피곤하다고 느끼며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은 뒤 빨래를 걷고 널었다. 그러고는 아침밥을 먹고서 캄보디아에서 마지막 방문 집이자 세계로 여행학교의 마지막 임무를 수행할 집, 반 렝사이 씨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나릇형은 월요일 밤부터 아프던 것이 너무 심해져서 결국 우리와 동행하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1집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일정 진행에는 별 차질이 없었지만, 왠지 우리 때문에 아픈 것 같아서 미안했고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나릇 형에게 다들 작별인사를 크게 해줬고, 짧은 영어지만 물어볼 수 있는 것들을 물어보며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마음도 넓고 배려심 깊은 나릇형은 괜찮다고 말을 해줬고, 우리는 사진 한 장을 다 같이 찍고서 헤어졌다. 우리가 방문한 반 렝사이씨의 집은 전통적인 캄보디아의 가옥 형태로, 더위와 모기를 피하기 위해서 1층을 비워놓고 기둥을 세운뒤 2층에 집을 지은 모습이었다. 실제로 집에 올라가보니 바람도 불고 시원했다. 바닥은 대나무로 만든 바닥이었는데, 그 때문에 더 시원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정말로 선생님들의 도움 단 1%도 없이 영상편지 전달 과정을 수행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반 렝사이의 여동생은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는데, 영어를 정말로 능통하게 해서 의사소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쩌면 캄보디아 청년들에게 대학이란 것은 우리의 것과는 다른 의미일지 모르겠다. 일생일대의 기회로 다가와서인지, 나릇 형과 반 렝사이의 동생과 같은 사람들은 정말로 죽을둥 살둥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다.
일정을 마무리 하고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으로 향했다. 아침에 출발해서 그런지 보통 버스에서 조잘조잘 떠들던 우리는 잠을 잤다. 점심쯤 볕이 뜨거워지자 우리는 화장실에 가기위해 일어났고, 그때부터 다시 노래를 부르고 놀이를 했다. 앞에서는 기사님이 운전하시는데 너무 큰 소리로 웃거나 떠들면 위험한 길에 운전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조용하라는 주의를 몇 번이나 받았다. 장장 7시간에 걸친 이동 끝에 씨엠립에 도착했는데, 정오가 채 되지 않아서 출발한 우리는 저녁 5시30분에 씨엠립에 도착했다. 씨엠립에 가서 수끼로 저녁을 해결하고는 좋은 호텔에 가서 누웠다. 누워서 TV도 보고 누나들을 불러서 이야기도 하다가 해피투게더3 라는 프로그램을 봤는데, 그곳에서 아이돌 가수 양요섭이 토스트를 해 먹는 것을 보니까 갑자기 먹고 싶었다. 배고픈 감정이 한국과 연결되어서 그날, 수요일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한국에 가고 싶단 마음이 든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의 일정이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밤을 샌다고 했던 희찬이와 현빈이는 나보다 먼저 잠이 들었고, 피곤해서 일찍 잔다고 한 나는 불후의 명곡이란 프로그램을 보다가 가장 늦게, 새벽 2시에 잠이 들었다.
목요일에는 아침 7시에 일어나서 대변을 해결하고 우리의 앙코르와트 가이드를 만나서 같이 차를 타고 앙코르 와트로 향했다. 앞서 밝혔듯이 나는 앙코르와트를 한 번 방문해 봤기에, 그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겠다. 대신에 기억에 남는 일은 전쟁지뢰 피해자들이 구걸하는 곳에 직접 내 손으로 내 돈을 기부한 일이다. 처음에는 내 돈 주고 내가 기쁘다는 말이 식상하고 뻔하다고 생각했다. 감동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감동적인 일이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것을 경험한 다른 나라 사람이 아리랑을 부르고 있는 곳에 가서 1달러를 기부하는 것은 마음 깊숙한 안쪽까지 건드리는 일이었다.
앙코르 와트를 방문한 뒤에는 짧은 시간동안 재래시장을 구경하고 백화점 안의 피자가게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김기대 선교사님과 마지막으로 방문할 곳이었던 ‘고엘 공동체’에 방문했다. 모직 산업을 하는 단체인 고엘 공동체는 마찬가지로 한국인 선교사님이 운영하는 단체였다. 기존의 모직 산업은 대체로 사장이 정말로 가감없이 거의 50%이상의 이익을 취하고 적은 노동료를 지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엘은 다르다. 노동력에 대한 정당하고 공평한 임금분배, 그리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전통공예와 노동을 가르쳐 주면서 일자리 창출과 전통문화 유지에 동시에 이바지하는 것이 고엘의 의미다. 그래서 고엘 공동체를 만드신 선교사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도 꼭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굳이 공부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도우고 웃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졌고, 학교에 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고엘에 대한 설명을 듣고 김기대 선교사님, 그리고 선생님 부부와도 작별 인사를 나눴다. 나중에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캄보디아에서 다시 만나잔 약속도 김기대 선교사님과 했다.
인천에서 비행기에서 내릴 때 나는 섭섭하다거나 못했던 일에 대한 후회가 들 줄 알았는데, 그냥 한국이 그저 반가웠다. 한국말로 된 안내판이 반가웠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한국말 수다가 반가웠다. 한국인 스튜어디스도 반가웠고 한국 땅도 반가웠다. 그렇게 인천 공항에 내린 우리는 짐을 찾고 드디어 사천다문화센터의 오렌지 스타렉스를 타고 진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은 정말로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서 오랜 기간 여행을 했다는 것과, 공항과 외국에서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 그리고 9명의 집단지성을 활용해서 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봤다는 것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정말 기억하기도 어렵고 셀 수도 없이 많은 것을 느꼈지만,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크게 와 닿은 것은,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모든 일에 임하면 잘 해결된다는 것이다. 항상 긍정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면 배려와 공존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선행 과제인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여행을 갔다오고 나서 내가 많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원래도 사실 짜증을 많이 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직접 나와 다른 10명의 세계로 여행학교 멤버, 다른 외국 사람, 다른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혀 보면서 사고의 폭이 조금은 넓어졌음을 많이 느낀다. 비록 미미한 발전일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한 발짝이라도 나아갔음을 크게 의미를 두면서 기행문을 마치겠다. 이번 세계로 여행학교는 정말 내가 죽을 때까지 크게 기억에 남을 여행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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