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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여행학교/제2기 세계로 여행학교

[제2기 세계로여행학교 기행문 ⑥]

개양중2 조현빈

 

-사전교육-

 

처음 교육을 갔을 때 친구들이랑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서 선생님, 동생, , 누나들을 처음 만났을 때 먼저 말을 걸어야 친해지는데 그게 쉽게 되지 않았다. 그래도 첫 번째 프로그램이 백종옥 선생님이 진행하는 액션러닝을 통한 팀워크 훈련이라 누나, , 동생들과 많이 친해진 것 같았다. 이 교육을 하지 않았다면 계속 말없이 재미없게 캄보디아, 인도네시아로 갔을 것이다. 11 대화하고 두 번째 팀 이름을 정하기를 하였다. 자기가 생각한팀명을 포스트잇에 적었고 행쇼, 까궁, 즐여 등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나왔다. 투표하여 까궁으로 정했다. 팀명만 있으면 섭섭하다고 팀 구호 정하기도 하였다. 이것도 생각한 것을 포스트잇에 적었다. 팀구호 많았다. 행쇼, 까궁, Du Du Du파이팅 등 많은 것이 있었는데 그중에 행쇼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첫 번째 프로그램이 끝났다.

 

 

두 번째 프로그램은 박상혁 교수님과 공정여행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난 공정여행이 공정하게 라는 뜻이랑 비슷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공정여행은 다른 문화를 따르고 다른 문화의 규칙을 지켜 내는 것이었다.

 

드디어 이주민들이랑 만나는 프로그램이다. 막상 만나다고 생각하니 떨리기도 했다. 처음 만나서 그 나라 인사를 몰라 먼저 무슨 말을 할지 걱정했지만, 이주민들은 한국말을 조금 씩 할 수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기본적인 언어는 조사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간식을 먹고 이주민들과 짝지 정하기를 했다. 로반나라는 사람이랑 파트너 되고 싶어지만 내 파트너는 린라니이였다. 그래도 좋았다.

 

 

-인도네시아-

 

84일 환송식 하고 기쁜 마음으로 출발이다. 막상 출발하려니 기대도 걱정도 됐다. 인천공항에서 홍콩행 비행기를 타고 홍콩에서 경유하여 비행기를 2번이나 타고 자카르타에 도착하였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첫 번째로 영상편지를 전달해야 할 곳은 피흐리집이다. “피흐리집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영상편지를 줄때 많이 긴장되어서 오줌도 나오지 않았다. 영상을 보여주고 가족들의 영상을 찍을 때는 밖에 나와서 아이들에게 풍선으로 칼, 왕관 등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아이들이 너무 많아 놀랬다. 아이들이 너무 많아 풍선도 많이 썼다. 다음집도 이렇게 많으면 다른 동네 아이들에게는 못주게 된다. 그래서 아껴 써야 했다. 이 동네 아이들도 우리나라 아이들과 똑같이 풍선을 좋아하고 뛰어 노는 것을 좋아했다. 풍선을 다 나누어 주고 아이들과 공놀이도 하였는데, 우리가 가지고 노는 공과 많이 달랐다. 정말 열악했다. 나는 좋은 환경에 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이것이 공정여행인가 보다. 우리가 방문 했을 때 인도네시아는 라마단기간이었다. 라마단은 우리나라의 설 명절과 비슷한 것인데 이 기간에는 금식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피흐리의 가족들은 오롯이 우리를 위해서 밥을 대접해 주셨다. 밥을 먹는데 그중에 치킨 너무 맛이 있어서 배 살찌도록 먹었다. 다음 일정을 위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 집은 수립도집이었다. “수립도씨 집에는 영상편지를 전달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수립도씨는 부푼꿈을 안고 한국으로 일 하러 왔지만 한국근로자들의 폭행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고 한국에 온지 석 달도 안돼서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미안한 마음으로 수립도씨 집에 방문했다. ”수립도씨 만났는데 엄청 친절한 분이였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사람이 수립도씨를 괴롭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국에 돌아가서 이주노동자를 만나면 친절하게 대해 줄 것이다. 우리는 다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하는 것은 잘못 된 행동이다. 아이들에게 풍선을 주러 갔는데 피흐리씨 동네 아이들보다 4배정도 많았다. 아이들이 너무 많아 계속 만들다가 풍선이 동이 나 버렸다. 받지 못한 아이들도 많았다. 그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수립도씨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진주학원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진주학원은 한국으로 일을 하러 가려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현지 고등학생 형, 누나들이 우리와 문화교류를 하기 위해 많이 모여 있었다. 함께 이야기도하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의사소통이 쉽지는 않았지만 손짓 발짓 하며 서로의 생각을 표현하며 짧은 시간동안 사이가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 오전 프로그램을 마치고 점심을 먹었다. 라마단 기간이라 현지 형, 누나들은 우리가 밥을 먹을 때 까지 기다렸다 함께 수영장으로 갔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마음이 급했다. 서로를 배려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수영장에 가서 인도네시아팀과 대한민국팀으로 수구 했다. 몸을 부대끼며 게임을 하고 나니 더 가까워 진 것 같았다. 피부색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가 친구가 되었다. 왠지 기분이 좋았다. 라마단 기간이라도 저녁밥은 먹을 수 있다 하여 우리는 함께 맛있는 저녁밥을 먹고 헤어졌다. 아쉬웠다. 진주학원에서 마지막 날이 명절 당일이라 서로에게 덕담을 하고 밤방씨 집으로 향했다.

 

방밤씨 집에 가서 영상편지 보여주었는데 가족들은 많이 울었다. 나도 슬퍼졌다. ”방밤씨 집에서 저녁을 먹고 밤새 달려 발리에 도착했다. 우리가 지낼 호텔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어서 한국 식당도 있었다. 목사님께서 특별히 한국식당으로 데려가 주셔서 된장을 시켜 먹었는데 엄마 요리가 그리워 졌다. 밥을 먹고 호텔 방에 들어가서 내가 참던 똥을 쌌다. 똥을 참은 이유는 피흐리씨 집, “수립도씨 집, ”밤방씨 집은 양변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장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최대한 적응 하려고 해도 화장실은 좀 힘든 것 같다. 방에서 놀기가 심심했는데 호텔 가운데 수영장이 있어서 바로 수영장복 입고 바로 수영장으로 갔다. 수영장에서 허빈 선생님께 다이빙도 배우고 많이 놀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이번 여행은 즐거운 여행인거 같았다. 수영장에서 다 놀고 호텔 방에 들어와 씻고 침대에 누워 TV를 켜는 순간 인도네시아 광고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채널 2번은 한국 채널이었다. 인도네시아도 한국 채널이 있다는 것 처음 알았다. 다음날, 아침밥을 먹고 쇼핑하러 갔다. 발리 백화점은 엄청 컸다. 2시간 안에 한 바퀴 도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시계 2개만 사고 쇼핑이 끝났다. 쇼핑을 다하고 울루와뚜사원에 갔는데 절벽이 너무 무서웠다. 절벽 위에 원숭이들도 많았다. 이 원숭이들은 안경을 보면 가져간다고 했다. 안경을 끼는 사람들은 거의 안경 벗고 지나갔다. 해가 지는 모습을 봤다 너무 아름다웠다. 많은 것을 구경했다. 이렇게 해서 인도네시아는 끝이 났다. 많은 것을 느낀 일주일이었다. 캄보디아에서는 어떤 여행이 될지 기대 된다.

 

-캄보디아-

 

새벽에 발리 공항에서 쿠알라룸프르 공항으로 가서 프놈펜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이번에도 비행기를 두 번 탔다. 8일 만에 4번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캄보디아 도착하여 게스트하우스를 갔는데 발리 호텔이랑 비슷한 구조였다. 현지에서 우리를 도와줄 나릇형과 김기대 선교사님을 만났다. 좋은 분들인 것 같다.

 

 

캄보디아에서 방문할 첫 집은 미앗사먼씨의 집이다. 가는 길에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프놈펜에서 오전 6시에 출발하여 점심시간이 다 돼서야 도착했다. 가는 길이 굉장히 험해서 예상 시간보다 3시간 정도 늦어졌다. 영상편지를 전해 주는데 미앗사먼씨의 가족들은 뭔가 반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걱정도 되고 무서웠는데 나중에 웃는걸 보니 내가 잘못 생각 한 것 이었다. “미앗사먼씨 집에서 영상 찍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배도 아팠다. 쓰러질 정도로 아팠다. 의자에 앉아 쉬었는데 그 아픔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밥이 먹고 싶지 않아 많이 먹지 않고 두 번째 집으로 바로 갔다. 정성스럽게 차려 주셨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두 번째 집은 첵소콤씨 집이다. “첵소콤씨 집에 갔는데 배가 또 아파지기 시작했다. 왠지 변비 가기도 했다. 세 번째로 넹비스나씨 집으로 갔다. 이동 시간이 길어 넹비스나씨 집에 도착하니 캄캄한 밤이 되었다. 집에 벌레들이 너무 많아서 무서웠다. 늦은 밤에 영상 편지 주고 우리는 배가 너무 고파 넹비스나씨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컵라면을 먹었다. 마지막 집인 로반나씨의 집에는 가지 못했다. 이유는 너무 늦은 밤이고 비가 많이 와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위험해서였다. 몸이 좋지 않아 여행에 집중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우리가 하고 이는 여행이 공정여행이니 만큼 사람들과의 만남을 소중이 생각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 아침 쌀국수가게에서 밥을 먹고 "히엣 로앗소티에씨 집으로 향했다. 우리가 밥을 먹은 식당에서 가까운 곳에 집이 있었다. 영상을 보여 주는데 어제처럼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번 에는 참을 만 했다. 그래서 참고 영상 편지 찍었다. "히엣 로앗소티에씨는 아들이 있는데, 부인이 출산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한국으로 가는 바람에 아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난 그걸 듣고 슬펐다. 이번에 우리가 사진과 영상을 찍어가서 보여주면 굉장히 좋아할 것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뭉클해 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정말 뿌듯한 여행인 것 같다. 함께 사진을 찍고 여섯 번째 속체이씨 집으로 이동했다. ”속체이씨 현재 한국에서의 계약이 끝나고 잠시 인도네시아로 돌아와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 우리가 인도네시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본인의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맛있는 밥과 과일을 대접 받고 속체이씨의 신혼집 구경도 했다. 다음으로 갈 집은 이어잔랏씨 집인데 내 파트너 린라니씨 집이 더 가까워 린라니씨 집을 먼저 가게 되었다. 드디어 내 차례다. “린라닌씨 집은 도시빈민가였다. 지금까지 방문한 집 중 가장 열악한 환경이었다. 진짜 방 하나가 끝이었다. “린라닌씨가 가족을 떠나 왜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한국으로 왔을지 알 것 만 같았다. “린나니씨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부디 아무 탈 없이 돈 많이 벌어서 고국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정기 목사님께서 시간이 없다고 빨리 다른 집에 방문해야 한다고 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파트너 가족들과 사진도 찍었는데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난 아무것도 못하고 다른 집에 가니 화가 났다. “이어잔랏씨 집에 가서 영상을 보여 드리고 밥을 먹는데 나릇형이 많이 아파 보였다. 우리는 형의 어깨를 주물러 주고 이야기도 많이 했다. 우리를 위해 고생을 많이 하는 것 같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어공부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 형은 영어를 아주 잘하는데 한국말도 조금 한다. 사랑해요, 배고파, 뽀뽀해요, 안녕하세요 등 많은 단어들을 알고 있었다. 나릇형 진짜 멋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가야 할 곳은 반렝사이씨 집이다. 2층집이었다. 마지막 집은 나릇형이 아파서 같이 못 왔기 때문에 우리가 설명하고 영상을 보여 드렸다. 마지막 집 까지 다 돌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그냥 뭔가 모르게 뿌듯하고 후련했다. “반렝사이씨 집에서 점심을 먹고 앙크로왓을 가기 위해 씨엠립이라는 도시로 출발했다. 도착하니 늦은 밤이었다. 늦은 저녁밥을 먹고 호텔로 가서 푹 쉬고 다음날 앙크로왓을 갔다. 같이 갔던 가이드가 설명을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 설명해 주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앙크로왓은 땅 밑에 레바 스톤이 있고 그 위에 샌트 스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 여자 때문에 베트남 사람과 캄보디아 사람이 싸웠다고 했다. 캄보디아 사람이 이겼다고 했다. 사원에 들어갔는데 높은 사원에는 계단이 너무 힘들게 되어 있었다. 목이 잘린 석상들이 많았다. 킬링필드 시절에 잘린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벽에는 그림이 많았다. 전부 망치로 두드려 조각한 것이었는데 신기했다. 이동을 하고 있는데 크메르루즈군이 설치했던 지뢰를 밟아 다리 또는 팔이 절단된 사람들이 연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지나가니 아리랑을 연주해 주었다. 우리는 그동안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선생님께 받은 1달러짜리 지폐를 모두 기부하고 사원에 들어갔다. 들어가는 순간 엄청나게 큰 나무가 있었다. 나무 때문에 사원이 무너져 있는 것도 많이 있었다. 난 나무를 베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가이드가 나무를 베면 사원이 무너지기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가 되면 이 사원들은 없어진다고 한다. 대책을 세워 문화유산이 지켜졌으면 좋겠다.

 

 

마지막 날이다.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고 뚜울슬랭 박물관을 갔다. 들어가는 순간 충격 받았다. 그 이유는 고문 도구들과 그림들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고문을 무섭게 했다. 손톱을 뽑거나. 목을 자르거나. 물에 얼굴을 담그게 하고 더 무서운 것은 아이들을 죽일 때는 총알이 아깝다고 다리를 잡고 거꾸로 들어 나무에 내리쳐 죽였다고 했다. 나는 그 사진보고 너무 무서웠다. 이 시절이 크메르루즈 시절인데 한 사람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었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때 많은 지식인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들었다. 만약 그 시절 지식인들이 죽지 않았다면 캄보디아라는 나라가 이렇게 까지 빈곤한 나라가 되었을까? 아이들이 거리에서 구걸을 하지 않을 정도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견학을 마친 후 고엘 공동체라는 곳에 갔다. 거기도 우리나라 선교사님이 현지인들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계셨다. 천연염색한 실을 현지에 있는 가정집에 외상으로 팔고 실을 산 가정에서 베틀로 천을 짜면 이것을 다시 사 오는 방식이었다. 일거리가 없는 현지인들을 돕기 위해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 온 천을 가지고 여러 제품을 만드는데 전부 사람들이 직접 재봉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회사는 일은 직원들이 많이 하는데 수익금은 사장이 많이 가져간다. 하지만 고엘 공동체는 판매되는 수익금을 한 사람이 많이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똑 같이 분배한다고 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말로만 듣던 공정무역이다. 공정무역 제품들을 많이 이용해야 되겠다. 뭔가 의미 있는 일에 돈을 쓰는 기분일 것 같다. 거기서 기념품 사려고 했는데 돈이 버스에 있어서 사지 못했다. 정말 아쉬웠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여행 내내 많은 것을 느끼고 내가 지금까지 엄청 편하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주민들을 우리나라 사람과 똑같이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도 자기 집에서는 훌륭한 가장이고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이다.

 

프롬펜 공항 도착하여 홍콩으로 갔다. 홍콩 오전1시에 도착하여 인천 가는 비행기를 두 시간 삼십분 기다렸다. 비행기를 탔는데 엄마, 아빠, 누나가 보고 싶어서 잠이 오지 않았다. 540분에 도착하여 진주로 출발했다. 엄마, 아빠, 누나를 볼 수 있어서 잠이 왔다. 진주에 도착해서 진주YMCA에서 가족들을 기다렸다. 엄마, 아빠가 늦어서 걱정했다. 다행이 와서 기뻤다. 이렇게 여행학교의 일정이 모두 끝이 났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