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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다문화자료실

한국의 이민 역사

<미국 이민 역사에 대해>

1. 한인의 최초 미국이민의 배경 - 하와이 이민

1882년 5월 22일에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은 타국이 불법적으로 한미 양국을 침해하면 쌍방은 최선을 다해 서로를 돕기로 되어 있다. 또한 이 조약은 한인이 미국에 이민할 권리를 명시하고 있으며, 제6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 국민이 미국의 어느 곳에나 내왕하고 거류하며 토지 가옥을 매매하고 건축할 수 있으며 적당한 영업이란 무엇이나 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미국 국민은 개항장과 통상지에 내왕하고 거류하며 토지와 가옥을 매매하고 건축할 수 있으며, 적정한 영업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미국정부를 대표하여 슈펠트(Commodore Shufeldt)가 서명한 이 조약이 체결된 후 미국은 광산 개발권과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이듬해 한국정부 우호 사절단 8명이 미국으로 향했다. 친선대사 민영익 일행(보빙사절단)은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였는데 한인으로 미국 땅에 첫발을 디딘 것이다. 이들은 몇 일 후인 9월 18일에 뉴욕에 도착하여 아더(Chester A. Arthur)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New York Herald, Sep. 19, 1883에 보도되었다. 민영익의 보병사절단은 맨하탄 23rd 5th Ave.에 위치한 Fifth Avenue Hotel에서 대통령을 만나 대담했음을 전하고 있다. 이 자리에는 홍영식, 서광범, 변수, 현홍택, 유길준과 한명의 미국 자문관 로우(Frederik E. Low)도 합석했었다. 이들은 약 9개월 동안 미국에 머물러면서 미국 문물을 견학하고 이듬해 1884년 5월 30일에 귀국했다. 이들 중 한 명인 유길준은 만 1년간 남아서 보스턴 근교에 있는 셀럼(Salem)에 있는 대머아카데미(Dammer cademy)에서 학업을 한 후 1885년에 귀국하여 <서유견문록> 주 내용은 미국 시민들의 생활, 정치구조, 서구문화를 소개하면서, 지주제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토지 소유의 재산권 보호와 그들의 자본을 이용하여 자본주의화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1884년 5월 말에 귀국한 서광범, 홍영식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동년 12월 4일에 갑신정변을 주도하여 한국의 폐쇄적인 보수주의 세력을 물리치고 나라를 개화하려 하였다. 이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씨가 정치망명객으로 1885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했으나, 송재 서재필(徐載弼, Philip Jaisohn) 선생 서재필 박사는 보성 출신이며 1884년 한국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과 독립당을 조직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키다 실패한 후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21살의 젊은 나이로 도미한 후(1885년) 66년간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살다가 1951년 1월 5일에 별세하였다. 선생은 10년간 유학을 마치고 1896년에 귀국하여 개화사상을 고취하고 독립협회(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이 회원임)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1898년에 청국의 사신을 맞던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서구식 민주주의 주장으로 고종의 의심을 받게 되었고, 그를 둘러싼 측근들의 모함으로, 그해 다시 도미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해방후인 1947년에 잠시 귀국하여 미군정 최고 고문관을 지냈고, 1948년 미국으로 건너와 여생을 마쳤다. 국내에서는 혁명가, 민중계몽가로, 미국에서는 독립투사, 의사, 실업인으로서 삶을 살았다.
미국에 정식이민은 하와이의 사탕수수 재배 노동을 위해 온 노동 이민자들이었다. 1903년에 하와이에 도착한 이들은 교회를 세우고 매주 한번이상 모여 예배드리고 친교를 나누며 향수심을 달랬다고 한다. 최초 이민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하와이 이민의 배경은 조선 왕조 말기의 혼란으로 인한 경제적 탄압과 수탈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인들이 대거 농지를 사들이에 따라 농민들은 경지를 잃은 대다가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에 시달렸다. 또한 1901년 함경도 지역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식량난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식량과 일거리를 찾아 멀리 시베리아나 만주로, 또는 서울 인천 원산 등 대도시로 이주했다. 설상가상으로 1902년 여름철에 전염병(콜레라, 장티푸스)으로 하루에 3-400 명씩 죽어갔다. 그래서 고종황제는 1902년 가을의 흉작을 예상하고 7월 26일을 기하여 쌀 수출 금지령을 내리고, 급하지 않는 토목공사를 중지시키고, 중범 죄수들을 석방하고 위생원들로 하여금 전염병을 잠재우는데 총력을 다하라고 칙명(勅命)을 발표하였다. 바로 이 무렵 한반도 방방곳곳에 알렌공사가 추진한 미국 이민 공고가 나붙기 시작하였다.
한편 1830년대부터 노동집약적 사탕수수 농업을 시작한 하와이에서는 이 무렵 외국의 값싼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하와이는 1843년 영국, 프랑스, 미국으로부터 독립국가로 인정받은 후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먼저 하와이의 본토인을 고용했다. 그러나 설탕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원주민 노동력으로 부족하여 자연히 외국에서 노동력을 수입해야 했다. 이즈음 1847년 중국인들은 미국에서 금광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하와이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1850년대부터 확대되어 가는 수수밭에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하와이 경작가회(The Royal Hawaiian Agricultural Society)에서는 중국의 노동자들을 모집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조직을 통하여 그들은 노동계약법을 외국인에게도 적용하여 외국에서 노동계약을 맺고 많은 외국인을 데려올 수 있었다. 그래서 1851년에 180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5년 계약으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1852년에는 293명의 중국인들이 입국했다. 정식으로 노동이민의 계약을 맺고 들어오게 된 것은 1864년부터였다.이 해에 노동이민법(Act to Provide for the Importation of Laborers and for the Encouragement of Immigration)이 통과되어 정식으로 해외 노동자들을 받기 시작했으며, 외국인을 관리하기 위한 이민국(Board of Immigration)이 정식으로 생겨났다. 이민국 위원회는 내무장관과 5명의 하와이 왕의 고문으로 구성되어 외국 노동자들의 이민계약을 관제하고, 또 외국인들의 자유이민을 장려하려는 목적에서 세워졌다. 일본인 노동자들의 취업이민은 1868년부터 시작되어 몇 차례 이민 왔으나 일본인 노동자들 중 혹사를 견디지 못하여 자살을 했으며, 감독이나 팀장에서 불순하게 행동하여 소란을 피워 감옥에 가는 경우가 발생하자 일본인 취업 이민이 중단되었다. 또한 중국인?일본인 노동자들의 규모가 커지고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그 해결책으로 한국?필리핀?포르투갈에서 노동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1876년에 하와이 왕국이 미국과 관세면제 계약을 맺었는데 이 해부터 1897년까지 46,000명의 중국 노동자가 대량 하와이에 이주해 왔다. 포르투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1878년까지 14,000여명의 포르투갈 이민자가 늘어났다. 많은 중국 노동자들은 3년의 노동기간이 끝나고 도시로 들어가 생활터전을 잡았다. 하와이가 미국의 영토가 된 1898년까지 약 5만 명의 중국인이 하와이에 오게 되었다. 이들 중국 노동자들은 계약이 끝나면 미국 본토로 많이 진출함에 따라 미국은 소위 ‘황색 위협’(Yellow peril)을 느껴 1882년에 중국인 추방법(Chinese Exclusion Act)를 통과시켜 중국인들의 미국 정착을 봉쇄하였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하와이에서도 그 이듬해에 중국이민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키게 됨으로 하와이는 절대적으로 노동력 부족 현상이 생겼다. 그리하여 대안책(alternative)으로 유럽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1881년 600명의 노르웨이 사람들, 1882-1885년에는 300명의 독일인이 왔으나 이들의 노동력이 너무 비싸기에 더 고용하지 못했다.
금지된 중국인 대신에 부족한 노동력을 계속 보충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일본에 눈을 돌려 1885년부터 일본인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이주시켰다. 이런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주로 하와이 본토인들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많은 부분의 경제력이 백인 미국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1893년에 하와이 공화국(대통령 Sanford B. Dole)을 세웠으나 이미 경제권이 약해지니 정치력도 약화되어 결국 1898년 미국과 교섭하여 미합중국과 병합함으로써 하와이는 미국의 한 영토가 되었다. 실질적으로 1850년 전후하여 하와이의 정치, 경제는 미국인들의 손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특히 부를 축적한 5명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정치적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여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였다. 이들은 구테타를 일으켜 왕조를 전복시키고 이어 1893년에는 샌포드 돌(Sanford B Dole)을 대통령으로 한 하와이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미국과 교섭하여 1898년에는 미합중국에 병합됨으로 공화국의 대통령인 돌은 하와이 영토의 총독(Governor)이 되어, 하와이는 법적으로 미국의 한 영토가 되었다(이후 60년이 지난 1959년 8월 21일에 하와이를 정식으로 미국의 50번째 주로 승격시켰다). 1900년에는 Organic Act라는 법을 제정하여 하와이 영토의 행정체제를 정식으로 조직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하와이는 미국법이 적용되어 하와이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당시 적용되고 있던 노동계약이 무효일 뿐 아니라 여기에 거주하는 노동 이민자들은 미국 본토로 이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 것이다. 1902년 당시 하와이의 총 노동인구가 42,029명이었는데, 이 중 일본인 노동자의 수는 전체의 73.4%인 31,020명이었다고 한다. 이 숫자는 중국인을 훨씬 능가하는 숫자였다. 일본인들도 중국인들처럼 대부분이 하와이에 정착하였고 일부는 미국 본토로 이주하였다. 하와이의 일당은 75센트였고, 본토는 1달러 50센트이어서 많은 일본인, 중국인들이 본토로 진출하였다. 이들이 캘리포니아의 비옥한 농장지대를 개간하였다. 하와이는 더욱 노동력 부족 사태가 생겼다. 그래서 노동력 수입을 위해 조선에 눈을 돌렸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나는 일본계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을 분쇄하기 위해서 또 다른 민족인 한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었다.
하와이 이민을 첫 이민으로 간주하는 것은, 대한제국이 ‘수민원’이란 담당기관을 설립해 처음 추진한 공식 인력송출이기 때문이었다. 1884년 9월 22일에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의료 선교사인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安連, 1858-1932)이 중국 상해로부터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의 자격은 서양공관(미국, 영국)의 부속 의사였고 선교사라는 직책은 당분간 감추었다. 때마침 갑신정변(1884년 12월 4일)으로 부상을 입은 민영익(閔泳溺)을 치료한 공으로 황실의 주치의로 발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지원으로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광혜원(廣惠院)을 세우고 서양의술을 가르쳤다. 그는 3년간 의료선교를 하였다. 1887년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도미했던 알렌은 1890년부터 17년간 주한 미국공사가 되었다. 그는 한인들의 미국이민문호를 여는데 적극 추진을 하였다. 마침 1901-1902년 사이에 관서지방에 가뭄과 홍수로 극심한 흉년이 닥쳐 기근문제가 심각할 때 대한제국정부가 이민정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901년 말 알렌은 휴가차 잠시 미국에 귀국했고 1902년 2월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경작자 협회의 한 이사인 어윈(William G. Irwin)을 만나 하와이의 노동력 부족문제를 알게 되었고 여기에서 한국인 이민 계획을 맡게 되었다. 그는 호놀룰루에까지 가서 관계자들과 직접 협의하게 되었다.
알렌은 서울에 돌아와 고종황제를 알현(謁見)한 자리에서 “지금 백성들은 개국 진취를 원하고 있을 뿐 아니라 흉년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하와이로 보내서 척식사업과 신문화를 도입하도록 함이 현책(賢策)이라”고 건의하여 고종의 윤허(允許)를 받고 1902년부터 이민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알렌은 하와이 주지사인 샌포드 돌(Sanford B. Dole)에게 편지하면서 당시 조선은 기근 때문에 양곡을 수입하는 형편이고 따라서 이민에 대한 정부관리들의 여론이 긍정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알렌의 편지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한 인종이라. 그들이 갖고 있는 오랜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가 쉽다... 조선 사람들은 중국사람에 비하면 교육하기가 쉬운 족속이라”고 알렌이 조선인을 부리기 쉬운 하층민이라고 소개했다. 결국 경제적인 곤경 때문에 노동이민을 모집하게 되었고 1902년 11월 16일 대한제국이 여권업무를 관장할 수민부를 설치했다. 당시 황성신문에서 이민모집광고를 대대적으로 게재하였고 하와이 당국에서 파견한 데슐러(David W. Deshler, Allen공사 친구의 아들)가 한국에 “동서개발회사”(The East-West Development Company)를 세우고 서울을 비롯하여 인천, 부산, 원산, 진남포 등 전국 주요 항도에 지부를 세워 하와이 이민 모집에 박차를 가했다. 현순, 장경화, 안정수, 송언용 등은 이 회사의 실무를 맡기도 했다. 특히 이들은 인천지방 감리사인 내리교회 존스 목사의 권유를 받고 한국인의 설득에 주력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조상이 묻힌 고향을 등지고 떠나간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 같은 생각에 아무도 응모하지 않자, 인천 용동교회(現 내리감리교회)의 담임목사인 선교사 존스(George H. Jones, 趙元時, 1867-1919)가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교인 남녀 50명과 제물포항 내 노동자 20명과 전국각처에서 모집된 51명이 이민 가기로 결정했다. 하와이 이민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감리교인 이었으며 최초 한인교회가 감리교회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존스는 초기 한인이민 성사에 공헌했을 뿐 아니라 후일 하와이에 직접 건너가 한인들의 농장생활을 목격하고는 'The Korea in Hawaii'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처럼 하와이 농업이민은 처음부터 교회가 배경이 되어 감리교 선교확장의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2. 최초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

드디어 1902년 12월 22일 최초의 조선인 121명으로 구성된 이민단이 제물포(인천)를 떠났다. 선창가에는 존스 목사가 나와 기도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하와이 감리사에게 보내는 소개장도 주었다. 인천항을 출발하여 일본 고베(神戶)에 도착하여 신체검사를 받은 결과 20명이 탈락되고, 101명(김흥찬은 102명으로 적고 있다)이 12월 29일에 미국 상선 겔릭호(Gaelic, Oriental and Occidental Steamship Co. 소속, 사진)를 타고 하와이로 출발하여 1903년 1월 12일 (화요일) 자정에 항구에 도착하였고, 13일 새벽 3:30분에 호놀룰루 항구에 정박하였다. 이들 첫 이민자들은 관례를 벗어나 부두에서 검역과 입국수속을 받지 않고 배에서 받았다. 여기서 검역관의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안질이 있던 15명이 다시 상륙 허가를 얻을 수 없어 돌아가고 결국 86명(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2명)만이 호놀룰루에 상륙하게 되었다. 인솔자는 이민회사의 총무일을 보던 장경화 전도사였고, 통역은 안정수 권사(후에 뉴욕한인교회 세우는데 공헌함)와 정인수였다. 나중에 하와이에서 활약이 많았던 김이제 권사(26세) 부부도 있었다. 신앙의 지도를 위해 홍승하 전도사도 동승하고 있었다. 이들을 환영하던 이들 가운데는 인천 존스 목사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고 나온 하와이 선교감리사인 피어슨(George L. Pearson)목사도 있었다. 안정수 권사는 농장주협회 노동부의 통역이 되었고, 정인수는 다른 이민자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오아후(Oahu)섬의 서북 끝에 있는 모쿠레아 농장(Mokuleia Camp in Walalua Plantation)으로 가서 일하게 되었다. 하와이를 출발한 갤릭호는 13일 저녁 6시 반에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당시에도 이민국이 지금의 자리에 있었고 이민수용소란 지금의 샌드 아일랜드이다. 1910년에서 1924년까지 뒤늦게 남편을 찾아온 부인네들과 자녀들, 또 결혼을 하려고 온 여성들이 남편이나 신랑될 사람이 다른 섬에서 미처 오지 못하여 이 수용소에 머물며 기다렸다. 또 눈병 등 간단한 질환이 있는 사람들도 완쾌될 때까지 며칠이고 이곳에 머물렀다. 그러고 보면 몇 명의 한인들의 첫 거주지는 샌드 아일랜드였다. 한인 이민이 도착한 1903년은 하와이가 미국에 병합된 지 10년이 지난 후이고, 또 미국의 영토가 된지 5년 후였기 때문에, 한인 이민들의 입국수속은 미국 이민국이 담당하였다. 1903년에서 1905년 동안 이민 온 한인들은 대한제국에서 발행하는 집조(=여권)를 가지고 도착하였다. 식구가 같이 왔을 때, 미성년자와 부인은 가장의 여권에 같이 기재된 가족여권을 가지고 온 이들도 있다. 아이들의 이름은 밝혀져 있으나, 부인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부인”이라고만 적혀 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에 도착한 한인들은 일본이 발행한 여권을 가지고 왔다.
2차 이민단 90명은 1903년 2월 10일에 제물포를 떠나 일본 나가사끼에서 콥틱(Coptic)호를 갈아타고 3주만인 3월 3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신체검사에 통과된 63(혹은 59)명이 하와이 땅을 밟았다. 이 배에는 통역관으로 현순(玄楯, 1879-1968)목사가 탑승해 있었다. 이들은 호아후 섬 북쪽에 있는 농장(Kahuku Plantation)에 정착하였다. 현순목사는 하와이 하와이(현지 발음은 ‘후와이’ Hawaii)는 북태평양에 작고, 큰 13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群島)를 이루고 있는데, 우리나라 제주도의 8배 정도의 크기이다. 이 137개의 중에는 대개 사람들이 살수 없는 작고 메마른 섬이 대부분이고, 이중에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섬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8개의 섬이다. 섬 전체 면적의 크기를 순서대로 살피면, 큰 섬(Big-Island: 이 섬이 하와이 섬이라 불린다), 마우이(Maui), 오하우(O'hau), 카우아이(Kaua'i), 몰로카이(Moloka'i), 라나이(Lana'i), 뉘하우(Niihau), 카후라위(Kahoolawe) 섬이다. 이 중 하와이 섬이 가장 큰 섬이기에 이 지역을 통칭 하와이라고 부른다. 이곳의 기후는 연중 여름날씨로 고온다습하며, 유황과 용암분출로 이루어져 뱀이 살 수 없는 땅이다. 인구로 보면 호놀루루가 있는 Oahu 섬에 하와이 인구 절반이상 살고 있다. 하와이가 서구에 알려지게 된 것은 영국의 해군 장교이며 탐험가였던 James Cook 선장이 1778년에 이 섬들을 발견하였다. Cook 선장은 이 섬들을 Sandwich 군도라고 명명하였다. 이때 하와이는 여러 개의 왕국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전사 출신 Kame-hameha 1세 왕이 1810년에 이 섬들을 모두 정복하여 통일왕국을 건설하였다 (현재 주청사 앞에 그의 동상이 있음). 그후 기독교 선교사들과 기업가들이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Kame-hameha II세는 선왕이 별세한 1819년부터 서양인들에게 호의를 베풀게 됨으로써 Hawaii 왕국은 점차 주권을 잃어가고 말았다. 따라서 그가 죽은 이듬해인 1820년 3월 30일에 New England의 조합교회(Congregational Church) 선교사가 처음 하와이에 오게 됨으로써 기독교가 구체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1839년까지 총인구 13만 가운데 약 15,000명의 조합교회 교인이 늘어났다. 1835년에 Ladd and Co.라는 회사가 Koloa 사탕수수 농장을 Kauai 섬에 설립함으로 많은 농장들이 세워졌다. 그래서 1843년에는 미국인들이 실질적으로 하와이를 장악하게 된다. 하와이의 총인구는 2002년 현재, 약 120만 명에 이르는데, 이중에 4분의 3의 인구에 해당하는 약 90만명의 사람들이 하와이에서 세 번째로 큰 오하우 섬에 거주하고 있다. 오하우 섬의 중심도시(mian city)는 호놀룰루이다. 호눌룰루 다운타운에서 북서쪽으로 자동차를 타고 약 55마일 속도로, 약 20분 가량 달리면 호놀룰루 공항을 만나게 되고, 그 옆으로, 2차 세계 대전시 일본의 공격을 받았던 유명한 진주만을 만나게 된다. 진주만을 지나,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약 9마일 정도를 더 달리면, 태평양 연안에서 가장 큰 미 육군 기지가 주둔하고 있는 스코휠드 배랙 (Schofield Barrack)이 있다. (김찬희, “하와이에 처음 이민이 오기까지,” 를 ‘태평양낙원’(太平洋樂園)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활화산 지역이어서 유황의 냄새로 뱀이 살 수 없는 곳이어서 천국과 같은 지상낙원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카후쿠(Kahuku)농장으로 갔다. 이곳은 기후가 온화하며 사시사철 꽃이 피며 열대성 열매가 많이 생산되고 있어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었다. 다음해인 1904년 33척 선편으로 3,434명, 1905년에는 16척에 2,659명이 도착하여(1905년 5월 18일 288명이 마지막으로 도착) 하와이 노동이민자의 총합은 7,226명이 되었다. 1903년 3월 19일 72명 호놀룰루에 도착; 4월 30일 113명 도착, 1904년 6월 1일 130명 도착, 7월 8일 176명 도착, 7월 30일 244명 도착, 9월 26일 152명 도착, 1905년 3월 31일 276명 도착, 4월 5일 191명이 도착하다.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85주년사, pp.407-8)이중 983명은 너무도 고된 노동으로 고국으로 되돌아갔으며, 2천 명에 한 명이 모자란 1999명이 여자 한 명과 함께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고, 이후 여기서 다시 각 주로 분산되어 살게 되었다. 이러므로 최초의 이민선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1903년 1월 13일부터 일본의 제지로 이민이 중단된 1905년 7월까지 65척의 선편으로 7,226명(남자 6,048명, 여자 637명, 어린이 541명)이 하와이로 들어왔으나 이들 중 479명이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받아 되돌아갔으므로 1903-1905년 사이의 하와이로 이민 온 한인 노동자는 총 6,747명이었다. 이민자 중 농부는 불과 1/7이었고, 대부분은 막노동자들 이었다. 또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전체의 약 65%나 되었다. 최초 이민자들 가운데는 교인들이 많았고, 목회자, 유학생, 향리의 선비, 광부와 군인, 농촌의 머슴, 역부, 건달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중 기독교인이 약 20%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돈을 벌어서 조국이 독립만 되면 돌아갈 생각이었고 미국에 영주할 의사는 전혀 없었던 임시거주자(sojourners)들이었다. 이들은 하와이 각 섬에 있는 40여 개 농장으로 분산되었다. 그들이 한 곳에 30여명으로부터 많은 곳은 2,3백 명까지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노동에 종사하였다. 작업은 자연생의 잡목들을 자르고 정리 작업을 하여 농토가 조성되면 거기에 관개시설을 하고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한 한인들의 생활은 거의 노예생활이었다. 이홍기 옹이 카우이 섬 콜로라 농장에서 일하던 일상 경험담에 의하면,
‘나는 4시 30분에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새벽 5시에 일터로 나가서 5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하여 오후 4시 30분까지 일을 했다. 점심시간 30분이 고작 휴식시간이었다... 십장은 하와이말로 루나(Linas)라 불렀는데 나의 십장은 독일인이었다. 그는 매우 엄격했다... 일하는 동안 허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울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루나(십장)는 우리를 마치 소나 말과 같이 그들을 채찍으로 다스렸다. 노동자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마치 죄수처럼 번호로 불렀다. 만일 누구나 그의 명령을 어기면 보통 뺨을 맞거나 사정없이 채찍으로 때렸다.
나는 막사에서 살았다. 숙소는 사병들의 막사같이 생긴 판잣집이었다. 한 칸에 미혼 남자 네 사람씩 기거했다.
이부자리는 한사람 당 담요 한 장뿐이었다. 가끔 난 찌는 듯한 실내 온도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리고 밥은 조석으로 손수 지어먹었다. 주일은 쉬었다. 그러나 아무런 오락시설도 없어 노동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주말 모임을 가지기도 하나, 더러는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하였다. 때로 심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향수심에 걸려서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당으로 남자는 67센트, 여자는 50센트였다. 한달 월급은 16불이었고, 통역관은 30불이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생활을 겨우 유지할 정도였다."
이런 생활가운데서 성도들은 농장단위로 교회(예배처소 수준)를 설립, 현실을 신앙으로 이겨나갔다. 하와이에서 처음 출생한 한인아이는 1903년 3월 3일(2차 이민단)에 도착한 현순목사와 부인 현 마리아 의 첫 딸 앨리스 현으로 5월 8일에 쿠울라우 지역(와이알루아와 카후쿠 농장이 있던 지역)에서 태어났다. 앨리스 현은 미국영토에서 태어났으니 미국 법에 따라 미국시민이 되었다. 그러나 부모를 따라 온 448명의 아이들과 4000여명의 어른들 대부분은 1952년 이후에야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1904년 9월 26일에 부모와 함께 하와이에 이민 온 박 에스더는 1902년 평양에서 출생하여서 2살 때 왔는데 미드-퍼시픽 고등학교(Mid-Pacific High School, 1918-1922)와 하와이 대학을 졸업하였다(1922-1926). 하와이섬의 코할라 여학교에서 1년을 가르친 후 19년 동안 호놀룰루 YWCA에서 근무하였다. 1947년 뉴욕 YWCA 본부의 요청으로 1922년에 김활란 박사에 의하여 창설된 한국 YWCA의 고문으로 파견을 받아 30년 동안 한국 YWCA를 위하여 일하고 1977년 하와이로 돌아왔다. 박 선생이 한국에 파견되었을 때, 미국시민이 아니었으며, 한국 여권도 없었기 때문에 특별 허가를 받고 입국하였다. 박 선생이 미국시민이 된 것은 1955년 4월 22일로 하와이에 도착한지 41년 후이다.
초기 이민자 중 84%가 20대 남자였고, 이들의 결혼 문제는 큰 현안이었다. 결국 사진 교환을 통해 결혼하는 ‘사진 신부’들이 1910년부터 하와이로 이민가게 된다. 1924년 미국 이민법에 의해 모든 형태의 한인 이민이 금지되기까지 총 1000명의 신부들이 하와이로 떠났다. 이들 첫 이민자들 가운데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1978년에 실시된 조사에서 파악된 이민 동기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하와이에 가면 빗자루로 땅을 쓸기만 해도 돈이 생긴다기에 그 돈으로 친정 식구들을 살리려고, 서자(庶子)라고 설움을 받아서, 예수쟁이라고 놀림받는 것이 싫어서, 남자들 횡포 때문에, 시부모를 안 모실 것 같아서, 일본인의 압박을 참을 수 없어서, 자손들을 좋은 나라에서 훌륭하게 교육시키고 싶어서, 모험심에서 등으로 다양했다.
이같은 하와이에로 노동이민의 물결은 1905년 하반기부터 돌연히 중지되게 되었다. 조선정부의 허락도 없이 일부 악덕상인들이 1904년에 멕시코로 가는 이민 1,033명을 모집하여 보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와이로 이민가는 줄을 알았는데 악덕상인의 장난으로 멕시코에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였고, 그들의 후예가 멕시코 유카탄(Yucatan)반도에 흩어져 살면서 아직도 미개한 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한인 6세까지 있는데 한국말은 전혀 모르며, 스페인어를 쓰고 있다. 유카탄주의 Merida시 근처에 이들의 후예 약 15만명이 성씨별(강, 고, 김, 이, 박, 염, 서, 유, 장, 최, 홍씨 등 23개 씨)로 촌락을 이루고 살고 있다. 1993년부터 미주내 한인교회가 이들을 찾아내어 선교사역이 시작되자 이제는 그들이 여러모로 문화혜택을 받고 있음은 다행이다.
또 하와이에 간 조선인들이 노예취급을 당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정부로서는 국민을 노예로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05년에 맺은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조선 정부에게 이민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하와이에 있는 일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1907년경에 하와이 노동이민이 거의 끊겼다. 1910년 미국 인구조사에 의하면, 하와이에 살고 있는 한인의 수가 4,533명이며 그중에 농장 노동자는 1,787명이었다. 한인의 60%가 농장을 떠나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에 전체 한인 4,950명의 27%인 1,300여 명이 호놀룰루를 주거지로 삼았다. 당시의 교통수단인 기차로 시골농장에 다녔고, 시내에는 전차가 있었다. 그렇다고 한인들이 쉽게 전차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지도 아니 하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한인 단체 사무실과 한인들의 교회가 어디에 있었나를 미루어 보면 한인들이 모여 산 곳을 짐작할 수 있다.

21세기가 시작된 현재에도 초기 이민자의 45명 정도가 생존해 있으며, 이중 6명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인천에서 시작한 해외 이민의 역사>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 증기선 갤릭(Gaelic)호가 힘찬 뱃고동을 올렸다. 배에 탄 한인들의 심정은 '이역만리'로 떠나는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남자56명(통역관 2명 포함), 여자 21명, 아이들 27명 등 모두 104명이었다. 일본 나가사키항을 거쳐 3주가 지난 후 이들이 내린 곳은 말로만 듣던 하와이 오아후섬 호놀룰루. 우리나라의 첫 해외이민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민 1세대의 출신지별 보면, 제물포출신이 68명, 강화 5명, 부평 10명, 교동 4명, 서울 7명, 기타 10명으로 인천인이 전체의 84%를 차지했다. 단순히 인천에서 이민선이 출발했기 때문에 하와이 이주가 인천 역사에 남기는 족적으로 의미있다는 고정된 관점에서 벗어나면 이 사실은 대단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과 하와이 이민사회의 대학교설립운동이 오늘의 인하대학교로 나타나는데, 위의 인적구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첫 발을 디딘 한인의 하와이 이주는 1905년 4월 말까지 순풍에 돛단 듯 이어졌다. 모두 65척의 배에 7천 843명(남자 6천 701명, 여자 677명, 미성년자 465명)이었다고 한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 된 이들은 억척스런 우리민족 특유의 기질을 발휘해 불볕 더위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1일 10시간 노동에 68센트를 받았다)의 악조건을 헤치고 하와이 지역사회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하와이 이주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해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한국정부에 이민중지압력을 행사하면서 중단된다.
더 이상의 집단이민은 불가능해졌지만 이주민들은 강인한 생활력을 통해 어느 민족보다도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1930년대엔 문맹률을 0.1%로 끌어내려 소수민족이민중 가장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왜 우리의 첫 해외이민지가 하와이었을까? 19세기 초 하와이에 정착한 백인세력은 경제적 기반을 갖출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하와이이민사를 연구중인 인하대 사학과 이영호 교수의 말은 이렇다.
"당시 선택된 것이 사탕재배였다. 문제는 막대한 노동력이었는데, 백인들은 동양시장에 눈길을 돌렸고 중국인과 일본인을 순차적으로 사탕수수농장에 유입했다. 그런데 인본일들이 18만명까지 늘어나면서 임금상승 등 까다로운 요구를하자 사탕농장주들은 이들과 견줄 만한 대항세력을 찾게 됐다. 이 노동력이 바로 한인들이었다"
방고. 일종의 신분증으로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은 방고에 새겨진 번호로 분류됐다. 민족에 따라 방고의 모양이 다르다. 일본인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 행정적 고려가 있었다는 얘기다. 1902년 사탕농장주들은 이 사업을 따낼 인물로 당시 주한미국공사 알렌(Allen)을 접촉했으며 극진한 대접을 받은 그는 고종황제를 설복해 이민 허락을 받아낸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미국인 데쉴러(Deshler)이다. Allen과 친밀했던 그는 인천에 '동서 개발 주식회사'(내리교회 인근에 있었다고 함)를 차린 후 하와이에서 일할 노무자를 모집했다. 처음에는 낯선 땅에 대한 거부감 탓에 응하는 이들이 없었다. 이 때 인천내리교회의 죤시(Jones)목사가 나서 "하와이는 아주 살기좋은 곳"이라고 설교해 교민 50명과 인천항 부두노동자 20여명이 지원했다고 전해진다.
이 교수는 "이민후 제물포 출신의 김이재 전도사, 인천내리교회 권사이자 이민회사 통역인 안정수 등을 중심으로 한인감리교회가 설립됐다"고 밝혔다. 그는 또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던 이들중 상당수가 인천사람"이라며 하와이이민과 인천, 그리고 인하대학교 설립과정에 맺어진 상관관계의

출처 : http://russia.kcm.co.kr/kor/kor01.html, http://www.ohex.com/utkr/1utkr/19http://www.kwmc.com

1.멕시코 에네껜 농장 이주 동포 역사

중남미 지역의 한인 이주 역사를 살펴볼 때, 한인의 범위는 이주할 당시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 역사에서 한민족이라고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조선 말기에 조선인의 신분으로 이주한 사람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일본국 조선인으로 이주한 사람들, 한국 전쟁 직후 이주한 '중립국포로'의 범주에 속하는 청년들은 민족이라는 범주를 통해 이주사에서 연속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중남미 지역의 초초 이주는 1905년 5월 15일,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Merida)주에 도착한 1,031명의 조선인 계약노동자(con-tract laborer)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멕시코는 디아즈 (Diaz)정권 하에서 미개발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 발전과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 때 경제 개발의 주된 단위가 된 것은 전근대적 고용관계에 기초한 대농장, 이른바 아시엔다(hacienda)였는데, 이것은 무엇보다 노동력 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아즈 정부는 894년 식민법(Law of Colonization)을 통과시킨 후, 노동력과 자본의 확대를 위하여 외국 이민을 유치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원래의 의도는 유럽인 이민과 자본 유치를 통한 백인화(whitenization)정책이었으나, 미국이나 아르헨티나만큼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 못해 노동력의 원활한 공급에 더욱 추중하게 되었다. 일본, 중국, 조선으 풍부한 노동력은 멕시코 정부와 농장주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민의 성격과 사회적 위치는 상이했지만, 1897년 경부터는 일본인, 1899년 경부터는 중국인의 멕시코 이민이 어느정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멕시코의 상황은 1905년에 이르러 조선의 상황과 연결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이후 주변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민중들의 경제적 궁핍이 극에 달하였다. 1904-1905년에 있었던 러일 전쟁은 기아와 약탈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무엇보다 농민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일자리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국외 이주가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경제 생활의 개선과 언전한 곳에 대한 열망은 만주와 연해주 등을 넘어 1903년부터는 하와이의 계약노동자 이주가 붐을 이루게 하였다. 1903-1905년 사이 하와이로 이주한 사람의 수는 7,000여 명에 달하였다. 결국 멕시코로의 계약노동자의 이주는 러일전쟁 이후 조선의 불안정한 상황과 하와이 계약노동의 선례가 맞물려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계약노동(contract labor)이란 근대 자본주의적 임노동 관계가 성숙되기 어전 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던 노동 관행으로, 원칙적으로는 피고용 노동자가 정해진 계약 기간 동안 정해진 임금을 받고 일하는 일종의 임노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그것은 주로 토지에서 축출되어 생계가 막연해진 농민 노동력을 흡수하는 장치가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계약노동자들은 계약 기간 동안 고용주에서 전근대적 노예나 농노와 다름없는 예속 관계를 맺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멕시코 특유의 농장 형태인 아시엔다에서 20세기 전후 계약노동은 노동력 충원의 주요한 형태 가운데 한로 자리잡고 있었다. 1904년 10월 15일부터 조선 각지에는 4개월 동안 멕시코의 계약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붙었다. 조선인 계약노동자 모집을 주선한 사람은 영국인 중개업자 마이어스(Myers), 일본인 다시노 가니찌, 조선인 이준혁이었는데, 이들은 자기들끼리 비밀 협정을 맺고 노동자 모집에서 과장된 전망과 이주 생활을 홍보하였다. 한편 대한제국 정부는 이들의 사기음모를 누치채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집 과정에 개입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하와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불분명하고도 과장된 풍문들이 나돌고 있었다. 그 내용은 사탕수수 농장으로 간 노동자들이 많은 돈을 벌고 있고 계약 기간이 끝나면 금의환향하리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맞추어 멕시코 유카탄의 녹색 황금에 대한 소문도 인천, 원산, 부산, 목포 등의 항구도시에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1905년 2월 집결지인 제물포항에는 1,033명의 계약노동 희망자들이 모여들었다.

광고 전단에 명시된 모집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40세 미만인 자, 불구가 아닌자. 남자를 따라가는 여자는 받아들임. 15세 미만인 어린 아이들은 받아주기는 하되 노동자로 취급하지 않음. 계약노동 주선자들은 희망자들에게 150원의 선금을 주고, 4년의 계약 기간을 명시한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계약서에 서명한 조선인 이주자들 대부분은 그들로부터 계약 조건을 명확하게 듣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계약서에 무엇이 적혀 있는 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계약한 조선인 이주 노동자들은 802명의 남자들 가운데는 전직 군인(당시 군대조직이 해체되면서 생겨난)이 가장 많았고, 농민, 수공업 노동자, 광부, 벌목꾼, 노비 출신자 등이 주로 포함되어 있었다. 멕시코로의 출발은 여권 발급 관계로 1개월 가량 늦어진 1905년 3월 5일 인천항에서 이루어졌다. 계약노동을 주선한 중개인들과 거래를 맺은 선박회사의 대우가 어떠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약2개월 간의 항해를 끝내고 5월 초 멕시코 서부해안 살리나 크루즈(Salina Cruz)에 도착했을 때 1,033 명의 승선 이주자들 가운데 사망자2명을 제외한 1,031명은 대체로 건강하게 멕시코 땅에 내렸다. 이후 이들은 기차로 멕시코 동해안의 코아차코알로스(Coatzacoalos)로 수송되었고, 다시 배를 통해 프로그레소(Progreso)를 거쳐 1905년 5월 15일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메리다의 에네껜(henequen)농장 지역에 도착하게 되었다. 역 근처에서 수일을 노숙한 후 계약노동자들은 인근 지역 약25개의 아시엔다에 10-50명씩 분산되어 팔리게 되었다. 계약노동자들의 농장 생활은 떠날 때의 기대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아시엔다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노예의 생활과도 같은 것이었다. 계약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멕시코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들의 생활과 문화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언어에 있어서는 스페인어, 유카탄 원주민 언어인 마야어 어느 것으로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은 모국어조차도 글로 쓰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중개인들로부터 들었던 계약 조건들은 모두 허위로 날조된 것이었다. 4년간의 노동 계약은 사실상 4년간의 노동으로 갚아야 할 부채계약과 같았다. 1인당 하루 노동의 품삯은 어른이 35센트, 청소년이 25센트, 어린이는 12센트였으며, 관습적으로 규정된 하루의 노동시간은 12시간 정도였다. 당시 25센트와 교환할 수 있었던 것은 쌀 2흡과 빵 9조각, 약간의 검은 콩 및 옥수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품삯을 받아 금전을 모으기는 커녕 어른 한명의 품삯으로는 생계를 이어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주를 하는 과정에서 든 경비와 계약 당시 받았던 선금은 모두 갚아야 할 부채로 계산되었다. 새벽 4시경 기상벨과 함께 일어난 노동자들은 일터로 나가서 날이 저물 때까지 노동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노동자들은 일터 뿐만 아니라, 집에서의 거주까지도 감독을 받았다. 밤에 이들이 거주하는 단칸방 움막은 열쇠가 채워졌으며, 다른 집이나 아시엔다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감독관이나 농장주로 부터 통행증을 얻어야만 했다. 농장주들은 조선인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동자의 다수를 이루고 있던 인디언과 조선인 이전에 이주해 있던 중국인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이들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해서 중간 감독관과 경찰들을 고용하였다. 노동자들의 작업과 생활의 통제에서는 자주 채찍을 비롯한 체형이 가해졌고, 따라서 일하던 아시엔다를 벗어나기 위한 도망자들이 속출하였다. 도망자들은 대부분 얼마 못가 잡혀 돌아왔으며, 계약 조건 위반으로 감옥에 갇혀서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때의 처벌은 평소의 고된 노동과 생활에 비하면 차라리 휴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1909년 5월에 4년으로 정해진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조선인 계약노동자들은 법적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하지만 경제적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이들에게 법적 자유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약 기간이 지나서도 별다른 생계의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아시엔다에 그대로 고용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선인 노동자들은 사실 멕시코 원주민 인디언들에 비해 농장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조선인들은 그들에 비해 매우 열심히 일을 했고, 무리한 작업 강요에 대해서도 순종적이었다. 반면 동양에서온 중국, 조선, 일본인 노동자들과 경쟁관계에 있던 원주민 노동자들의 태도는 이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들의 눈에 동양인 이주노동자들은 그저 돈만 아는 일벌레로 비쳤고,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소수였지만 조선인 노동자들 역시 그런 인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1910년에 일어난 멕시코 혁명은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급변시켰다. 농장주들과 연결된 지배 세력이 무너지고 농민.노동자 및 중산층에 지지 기반을 둔 혁명 세력이 등장함으로써, 조선인들을 비롯한 동양인 노동자들에 대한 적개심은 사회적으로 더욱 증폭되었다. 결국 이러한 멕시코 내의 상황은 조선인 이주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적응 형태와 선택을 요구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조선인들은 점점 늘어나는 사회적 압력에 대응하여 한인회 조직 등을 통해 내부적인 부조와 결속을 강화하는 한편, 일부의 사람들은 멕시코 이외의 다른 중남미 지역으로 재이주를 결행하게 되었다. 유카탄에서 타지역으로의 이주는 1913년부터 시작되어 주로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향해졌다. 1921년 3월 초 멕시코 이주노동자들 가운데 약 300명은 쿠바로 대대적인 이주를 하였다.

2.미국 이주 동포 역사

1998년 현재 미국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韓民族) 중 가장 많은 약 200여만 명 (2,057,546, 외교통상부, '98.7 기준)의 한(韓)인이 거주하고 있다. 해외 동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 거주 한(韓) 인들은 어렵고 힘든 여건 속에서 쌓아 올린 노력의 결과로서 미국 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소수 민족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한편 미국으로의 한(韓)인 이주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1903년부터 1905년까지 계속된 하와이로의 이주와 한국 전쟁 전후의 특수 한 상황에서 발생된 미국 이주, 그리고 1965년 미국의 새로운 이민법이 발효된 이후 미국 본토로의 이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 이주는 서로 다른 시기에 발생되었으며 이주 성격 측면에도 큰 차이가 있다.

이주의 역사


19세기 후반 우리 나라는 국내·외의 혼란스런 정세로 몹시 힘든 상황이었는데, 국외로는 한반도 주변에 서구 열강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국내로는 조선 정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국력이 쇠약했다.
우리 나라와 미국은 1882년 5월 22일 인천(제물포)에서 조·미 수호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에는 조·미 양국 국민이 상호 상대국을 자유로이 여행하며 경제 활동도 할 수 있고 상대국에 거주할 수 있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이 조약을 근거로 1903년 미국 하와이로의 이민이 추진될 수 있었다.
1830년 이후 하와이의 여러 섬에 거주하던 미국인들은 설탕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당시 야생으로 자라던 사탕수수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하와이 사탕 농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사탕수수 재배에 필요한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따라서 농장 고용주들 은 1850년대부터 중국 노동이민을 초청했으나 일이 너무 힘들어 3년 노동 계약이 끝난 후에는 사탕수수 농장을 떠났고, 1885년부터는 일본으로부터 노동자를 초청하였으나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파업까지 단행하는 경우 가 빈번히 발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미국 농장주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때마침 본국을 방문하고 대한제국으로 귀임 하던 미국 공사 앨런이 하와 이에 들러 농장주에게 근면하고 착실한 한(韓)인의 고용을 추천하였으며, 이에 하와이 사탕 재배자 협회 비숍이 내한해 대한제국 정부와 이민 계약 을 체결했다. 그 이전의 중국이나 러시아로의 이주와 달리 하와이 이민은 우리 나라 정부에 의해 공인된 최초의 합법적 해외진출로, 처음으로 우리 나라 사회의 대중 계층이 서구 사회와 접촉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고종 황제는 중국인이 가기 힘든 미국에 한(韓)인이 갈 수 있다는 데에 상당히 고무되어 궁내부 내에

이민 사무를 담당할 수민원(綬民院)의 설립 을 허가했다. 수민원은 인천에 동서개발회사 본부를, 그리고 원산, 진남포, 부산, 목포 등지에 지부를 두고 하와이 이민 선발을 위한 공고를 했다. 이때 공고된 이민의 선전 및 광고의 내용은 『기후가 온화하고, 학교에서 영문을 가르치며, 농부가 아무 때나 직업 얻기가 편리하고, 월급은 미국 돈으로 15달러(일본 금화 30원, 대한제국 화폐 57원 가량)이며, 집과 식수 ·치료는 주인이 부담한다』라는 것이었다.
한편 인천 교회의 존스 목사를 비롯한 미국 선교사들은 신자들에게 하와이를 소개하면서 대한제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살기 좋은 하와이에 이민을 가서 보다 행복한 기독교인이 되라고 권고를 하였으며, 또한 당시 1901년 에 심한 한재와 기근까지 겹쳐 농민들의 생활이 궁핍해져 많은 사람이 응모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하와이 이민 모집에 신청, 선발된 사람은 50여 명의 기독교 신자와 20여 명의 부두 노동자, 그리고 농민들이었다.

드디어 1902년 12월 22일 우리 나라 최초의 미국 이민 희망자 121명은 제물포(인천)를 출발하여 일본 고베항에서 신체 검사를 받았는데, 남자 55 명, 여자 21명 아동 25명 합계 101명만 통과되었다. 1903년 1월 13일 이들은 상선 겔럭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 는 질병으로 입국이 허락되지 않아 결국 하와이 땅을 밟은 한(韓)인은 97 명이었다.
1차 이민이 있은 후 매월 이민선이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1903년 1,133명, 1904년 3,434명, 그리고 1905년 2,650명 등 대한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박 탈당하여 합법적 이민이 완전 폐지될 때까지 총65회 7,226명의 한(韓)인이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하와이에 도착한 한(韓)인들은 오아후, 마우이 등 하와이의 여러 섬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모집 광고와는 달리 작업 환경이 너무 가혹해서 이민자들은 실망과 불안이 대단하였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는 한 건물에 수십 명이 같이 숙식을 할 수 있는 농막에서 생활했으며, 다만 가족이 있을 경우 칸막이가 있는 조그만 독채방을 받았다. 그리고 식사는 농막 거주자 전원이 함께 하거나 한 농장 있는 여러 농막 사람들이 같이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하와이 수수밭에 는 한(韓)인만이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필리핀 사람, 푸에르토리코 사람, 포르투갈 사람 등이 있었으며, 그리고 이들을 감시하는 감독관으로는 주로 독일인이었다.
화씨 100도나 되는 무더운 태양 아래, 모든 노동자들은 아침 6시부터 매 일 10∼12시간씩 허리를 구부린 상태에서 억센 수수대를 칼로 잘라내는 힘 든 작업을 하였으며, 억센 수수대에 찔려서 손과 팔에 피가 맺힐 때도 자 주 있었다. 또한 사탕수수대가 사람 키의 2배인 3∼4m로 자라 통풍도 잘 되지 않는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이민자들은 마치 노예처럼 작업복 가슴에 번호판을 달고 감독의 가죽 채찍을 맞아 가면서 일했다.
이와 같이 노예와 같이 힘들게 일하고 받는 임금은 한 달(일요일 및 공휴일 제외)에 남자 약 18달러, 여자 약 16달러(당시 한인 노동자의 수입은 백인의 1/10정도) 정도였으며, 이 월급에서 식비 및 세탁비를 지불하고 남 은 순수한 수입은 월 9달러∼11달러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들은 고국에 돌아갈 날만 고대하고 힘든 노동자 생활을 참고 견디어 냈다. 이러한 사실이 고국에 알려지면서 국내의 이민 희망자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하와이에 도착한 한(韓)인들은 앞서 온 중국 또는 일본 이주자와 다른 특성이 있었다. 중국과 일본 이주자들은 대부분 농민으로 중국 또는 일본의 몇 개 현에서 집중적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한(韓)인들은 이민자의 약 15% 만 농민이었으며 대부분은 도시 노동자, 하급 공무원, 군인, 학생, 광부, 머슴 그리고 정치 망명객들이었다.

이들 한(韓)인들 중 약 65%가 한글을 쓸 수 없는 문맹이었으며 특히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또한 하와이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성씨별로 종친회를 조직했고 일본인은 현민회를 만들어 집단 생활을 영위했으나 한(韓)인들은 교회중심으로 사회 생활을 했다. 그것은 하와이 이민을 처음 주선한 사람이 대부분 미국 목사 였던 관계로 이민자들 사이에는 기독교 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 신자들이 1903년 7월 4일 오하우 섬의 모쿨리아에 있는 농장에서 예배를 본 것이 효시가 돼 매주 예배를 보았다. 당시 기독교 선교에 목적을 둔 서양 선교사와 달리 한인교회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일반 한(韓)인들에게도 다 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교환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고달픈 농장 생활에 지친 대다수의 한(韓)인들을 위로하는 일종의 안식처 역할을 하였다.

1905년에 완전 중단된 하와이 이민은 지상 낙원에서 황금을 한 손에 쥐 어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떠났던 한(韓)인들에게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물론 어려운 역경 속에서 성실히 저축을 하고 사는 한(韓)인들도 많았으나 일부 이민자들은 외로움과 고통을 술과 도박으로 달래기도 하였다. 당시 한(韓)인들 사회에서는 이민자의 약 90%(남자 약 7,000명, 여자 약 700명) 가 독신 남성인 관계로 심각한 성비 불균형 현상이 나타났었다. 당시 독신 한(韓)인들은 백인이나 원주민 여자는 물론 심지어 중국인 또는 일본인 여 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 도 위안 받을 가족이 없었던 일부 노동자들은 문란한 생활을 하거나 혹은 탈출하는 등 노동자들의 유동 현상이 심해졌다.
이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작업 능률도 오르고 과외 일손이 늘 것을 기대하면서 이른바 '사진 결혼' 방법을 채택, 미국 이민국의 입국허가를 받아 주었다. 사진 결혼은 하와이에 이민간 남자가 본국의 처녀에게 자기의 사 진을 보내어 선을 보았으며, 시집가기를 원하는 처녀들은 신랑감의 사진을 보고 사진 결혼식을 올린 다음 신랑 배우자의 자격으로 이민 수속을 마치 고 태평양을 건너 호놀룰루에 들어왔다. 이와 같이 사진을 보고 결혼을 결심하고 하와이에 온 여자들을 일명 '사진 신부'라고 하며, 1910년부터 노동법이 개정되어 동양인을 배척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새로운 이민이 완전 중지된 1924년까지 15년간 약 1,000명의 신부가 하와이에 들어와서 가정을 이루었다. 하와이에서 보낸 남자의 사진은 대부분 이민 올 때 찍은 것이어 서 한국으로 보낸 사진과 실물에 차이가 많아 부두에서 신랑을 보고 실망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나이 차이가 있어도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결혼을 하고 살았다.

사진 신부가 도착하기 전 미국의 철도 회사에서 사람들을 모집해 갔고 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로 사탕수수밭을 떠난 사람도 있었으나 특히 사진 신부가 도착한 후 여자들의 권유로 사탕수수밭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젊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 수준도 높아 도시생활에 빨리 적응했다. 도시로 진출한 한(韓)인들은 부두노동, 정원사 등 단순 노동에서 시작하여 점차 잡화상, 양복점, 자동차업, 가구점, 구둣방, 여관, 약방 등 기술과 자본이 필요한 영역으로 확대 진출하였다. 한(韓)인들은 사탕수수밭에서 호놀룰루 등의 도시로 진출했으며, 시간이 경과하면서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를 통해 캘리포니아주, 오리건주, 워싱턴주, 몬태나주, 애리조나주, 유타주 등으로 확대돼 갔다. 이런 곳에서는 농장을 경영하거나 철도 등에서 일을 했고 도시에서는 수위, 집 관리, 식당 등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2)한국 전쟁 이후
미국은 1965년 이민법을 개정할 때까지는 서양인 이민과 달리 용모와 언 어, 문화 및 생활 관습이 완전히 다른 동양계 이민은 연 100명씩밖에 받지 않을 정도로 제한하였다. 따라서 해방이후 이승만 박사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한국으로 귀국하였을 뿐, 미국으로 이주하는 사람 은 거의 없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을 통해 미국이 한국전에 참가하면서 미국 군인이 한국 여자와 국제 결혼하는 사례가 생기기 시작했다. 국제 결혼한 한국 여자들 은 대부분 학력이 낮고 가정 환경이 어려운 여인들로 대부분 미군 부대 부근의 술집에서 일하거나 미군을 상대로 매춘하던 여인이 많았다. 물론 일 부는 간혹 고등교육을 받아 미군부대에서 사무직원으로 근무하다 미군과 국제 결혼을 한 여인도 있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전쟁신부법'을 적용, 보완해 '병사애인법'을 제정했다. 미국 군인과 결혼한 한국 부인들은 1950년 10월부터 미국 시민권을 받아 미국으로 이주를 시작한 이래 해마다 증가해 1956년에는 500명에 달했고 1958년에는 1,000여 명 등 약 50,000명에 이르렀다. 속칭 '양공주'라고 일컫는 한국 여자들은 미국에서 장보기, 자동차 운 전 등을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의 괄세가 심했으며, 일부는 이혼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가족과 헤어지거나 부모를 잃는 고아들이 자선 단 체를 통해 미국 가정에 입양되어 이주된 경우가 있었다. 처음에는 미국 군인과 한국 여자와의 사이에 태어난 '혼혈고아'가 미국 가정에 입양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한국인 전쟁고아도 이러한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
국제 결혼한 여자나 입양아와는 달리 유학생들은 일정 기간 공부한 다음 귀국할 목적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전체 유학생 중 단 6%만이 귀국했고 대부분의 유학생은 미국에 남아 시민권을 획득하고 한국 교포가 되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1950년까지 이민가족을 중심으로 1만 명 미만 에 불과하였으나, 1960년 후반기에는 전쟁신부와 전쟁고아를 포함하여 약 1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964년 집계에 의하면 국제결혼에 의해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이 6,423명 그리고 고아로 입양된 어린이가 5,348명, 유학 목적으로 미국에 건너간 사람이 3,278명 도합 15,049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와 같이 해방 후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국제 결혼한 한국 여인, 전쟁 고아 그리고 유학생 등 크게 3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3)새로운 이민법 발효이후

1965년 발표된 '하트-셀러법'이라는 새로운 이민법이 발효되면서 미국으로의 이민에 있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이민법은 종전의 이민법과 달리 태평양 연안국의 동양계 국가에서 연간 17만 명 그리고 유럽의 서양계 국가에서 연간 12만 명을 이민으로 수용하며 한 국가에 2만 명의 이민을 할당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최대 연간 2만 명 이 미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대통령인 존슨 대통령이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서명을 할 정도로, 우리 나라뿐 아니라 미국의 이민법에도 상당한 변화를 주었다.

이 법에 따르면, 1순위는 미국의 시민권자의 배우자나 미혼 자녀(전체의 20%)를, 2순위는 영주권자의 배우자나 미혼 자녀(전체의 20%)를, 3순위는 전문직 종사자나 예술과 과학분야의 특기를 가진 자(전체의 10%)를, 4순위 는 시민권자의 기혼 자녀(전체의 10%)를, 5 순위는 시민권자의 형제 자매 (전체의 24%)를, 6순위는 미국이 필요로 하는 일반 취업 이민자(전체의 10 %)를, 7순위는 공산국가로부터의 피난민(전체의 6%)를 대상으로 이민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위의 이민법을 크게 세 종류로 분류하면, 1순위, 2순위, 4순위, 5순위를 포함하는 ‘초청 이민’과 3순위와 6순위를 포함하는 전문 기술자의 ‘취 업(계약) 이민’, 그리고 7순위에 해당되는 ‘특별 이민’으로 구분할 수 있다.

미국에 먼저 입국하여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받은 사람이 한국에 있는 사람을 초청하는 사례를 '초청 이민'이라 하는데, 대부분 국제 결혼한 여자와 유학생으로 입국했다가 미국에 영주하게 된 사람이 가족을 초청을 하는 경우이다. 특히 국제 결혼한 한국의 여인들은 한국에 있는 친인척을 초청함으로써 미국 교민사회 형성에 큰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미국이 필요로 하는 직장에 취업하는 취업이민에는 의사, 간호원, 약사 등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자동차 수리공, 차체 수리 공, 텔레비전 수리공, 전화 수리공, 용접공, 전기공, 구두수선공, 시계수리 공, 상수도 하수도 연관공, 페인트공, 정원사, 목수, 병아리 감정사 등 기술직 의 사람이나 단순 노동자들이었다. 이러한 기술을 한국에서 배워 간 사람 도 있었으나 대부분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고 기술교육을 받는 사람이거나 이민정착 훈련과정의 일환으로 기술을 습득하고 취업하는 사람들이었다.

미국 이민의 초기에는 한국이 받은 할당 인원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었다. 마침 서독에서의 계약 기간이 완료된 서독 광산근로자와 간호원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이른바 '3각 이민'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역경에서 다진 강한 의지와 특히 군인들보다 더 강한 동지애로 연결돼 미국 로스앤젤레스나 시카고 한인촌을 건설하는 핵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민자의 수가 증가, 한국의 할당 인원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이주하면서 위장 이민이 생겼다. 도피이민에서부터 불법 체류 자까지 증가해 1975년 이후에는 한국에 할당 인원을 2만 명에서 3만 명으로 증가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으로의 역이민이 시작될 때까지 ‘American Drea m’을 가지고 미국으로 이주하는 한국인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관광비자로 장기 체류를 하거나 명목상 어학 연수이지만 취업하는 것, 그 리고 서류상으로 부부가 됐다가 미국에서 영주권을 얻으면 이혼하는 위장 결혼, 재산을 도피시킬 목적의 도피 이민, 한국을 떠날 때 받은 사증과는 다른 목적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등 여러 지 수단을 강구해 많은 사람들 미국으로의 이민을 원했다.

이들 이민자들은 경제적으로 잘 살아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약 65%), 혹 은 북한의 도발 위험, 인권 무시 등으로부터 벗어나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약 22%), 그리고 새로운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약 13%) 미국으로 떠났던 것이다.

1965년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 이민은 의사·간호사·사업가·엔지니어 등 고급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민의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엘리트 이 민'이라 불리우고 있다. 반면 198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 을 이룩하면서 엘리트에게는 미국 이민의 열의가 식어 갔으며, 따라서 고 학력 이민에서 먼저 이민을 떠났던 사람들이 한국의 가족을 초청하는 가족 초청 이민으로 변해갔다.


고려인 이주 동포 역사

현재 구소련 영역인 독립국가연합(CIS)에는 486,857명(외교통상부, '98.7 기 준)의 한(韓)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한(韓)인은 우즈벡 공화국과 카자흐 공화국이 있는 중앙아시아에 약 35만 명이 거주하며, 연해주 중심의 러시아 공화국에도 약 1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의 연해주로 처음 이주하였던 한(韓)인들은 러시아의 특수한 사정에 의해 중앙아시아와 다른 지역으로 분산되었으며, 이들 이외에도 일본에 의해 강제 징용된 한(韓) 인들이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다.
구소련에 이주한 한(韓)인들은 힘겹고 어려운 역경 속에서 의연하게 살아오고 있으나,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다.


1)생계 목적의 농민 이주

한반도와 국경을 접한 중국은 17세기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의 만주 지역을 청나라 태조의 발상지라 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이른바 '봉금령'을 내렸다. 따라서 한반도를 떠날 입장에 처한 대부분의 한(韓)인 들은 만주 지방이 아닌 연해주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홍경래의 난(1812년)이후 조선 조정에 불만을 가지거나 곤란한 입장에 처한 양반, 그리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농민을 주축으로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1860년 북경 조약에 의해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면서, 러시아 정부 는 변방 개척을 위해 한(韓)인들의 입국을 허용하고 토지를 제공하는 등 각종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시간이 갈수록 이주하는 한(韓)인들이 늘어났다. 러시아의 기록에 의하면 1857년부터 러시아 국경 지대에 출현하던 한(韓) 인들이 1863년부터 두만강에서 가까운 포시에트 지방에 한인마을을 형성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은 학계에서 인정한 최초의 한(韓)인 해외 이주가 된다.
1860년대 초창기 이주 사례는 주로 함경도 출신의 가난한 농민들이 국경 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즉 민란과 병란으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으며 특히 정부와 타락한 벼슬아치로부터 푸 대접을 받는 상황에서 농민들은 자구책의 수단으로 연해주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초창기에는 이렇듯 빈곤한 농민들이 생계 목적으로 국경을 넘어가 는 이른바 '농민이주'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러시아로의 이주가 늘어나자, 조선 정부는 한(韓)인의 이주를 방지하기 위해 유민방지책(1867)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지책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어려운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여건으로 연해주로의 이주는 계속 늘어만 갔다. 특히 1869년 기사흉년(己巳凶年)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 게 되었으며, 이것을 모면하기 위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이주하였다. 연해주로 이주한 한(韓)인들은 허허벌판 으로 남겨져 있던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을 중심으로)의 황무지를 개간,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꿔 나가면서 한인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1869년 이후 한(韓)인의 대량 연해주 이주는 이전의 한(韓)인에 대한 러시아의 우호적인 정책을 재고하도록 만들었다. 러시아 정부는 한(韓)인의 이주를 억제하는 동시에 기존이주 자를 국경에서 멀리 그리고 러시아인 촌락에 분산시켜 놓음으로써 한인 이민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문제에 대처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한(韓)인들은 수이푼, 슈판, 레푸 강가 그 리고 수찬 계곡 등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극동 지방의 한(韓)인 이민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러시아가 극동 지방을 유럽계의 이민으로 채우려는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한(韓)인의 이민을 배제하려는 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이 다. 따라서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은 러시아에 제물포, 원산, 부산, 그리고 양화진(서울) 등 여러 지역을 개방하여 통상을 확대하려는 내용이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한인 의 이민을 제한하고 통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을 3종류, 즉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자, 장기적으로 체류하거나 귀국할 자, 그리고 잠 시 체류하는 자로 분류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즉 국적이나 토지를 취득하지 못한 한(韓)인을 추방하려는 러시아의 의도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제정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러시아로의 귀화였다. 가난했던 농민들은 귀화 조건, 즉 모든 벌금을 완납했다는 증명 서, 은화 20루블(당시 거액), 러시아 정교(러시아어로 된 성경 교리) 세례 등 여러 조건을 충족시키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한 (韓)인들은 가난하여 등록비용을 내지 못했으며, 결국 거주허가증을 발급 받지 못한 상태에서 거주하였다. 실제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 국적 들 취득한 한(韓)인은 연해주에 거주한 전체 한(韓)인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러시아로 이주한 한(韓)인을 원호(元戶)와 여호(余戶)로 구분하는데, 러시아에 귀화를 한 원호는 러시아인과 같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으며 세금도 내고 러시아인으로서 누리는 각종 혜택을 받았으나, 귀화하지 않은 여호는 소작인 신분이면서도 원호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으며 특히 귀화하지 않은 세금, 러시아 정교의 세례를 받지 않은 세금,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은 세금 등 각종 세금에 시달렸다. 또한 러시아 지주들은 귀화하지 못한 한(韓)인들이 본인의 권리와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하여 싼값으로 한인들을 고용하였다. 그리고 한(韓)인들은 사소한 과실이나 과오에 대하여 법적·행정적 보호 혜택도 없이 벌금을 납부할 수밖에 없는 억울하고 비참한 생활을 했다.
한편 한(韓)인들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든 러시아 극동지역의 개발 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황무지를 개간하여 비옥한 옥토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논농사를 하여 이 지역의 식량(쌀) 공급을 원활하게 한 것은 한(韓) 인들의 크나큰 공헌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러시아 혁명위원회가 한 (韓)인 거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그리고 한 (韓)인들은 농업이외에도 어업(약 3,000여 명 종사-1904년 기준), 금광을 포함한 광업(약 5,000여 명 종사-1906년 기준), 목재업 등에 종사함으로써 연해주의 경제 활동에 크게기여 하였다.
러시아로 진출한 한(韓)인들은 두만강 하구에서 가장 가까운 포시에트, 수이푼강 유역의 수이푼, 바라바셰프, 든크로브 등 연해주를 중심으로 거주하였다. 한(韓)인들이 연해주에 많이 이주한 이유는 첫째 지리적으로 한 반도와 인접하여 이동 거리에 대한 부담이 적었으며, 둘째 개간할 황무지 가 많아 농토 사용에 대한 어려움 없이 농사를 쉽게 할 수 있었으며, 셋째 일본의 군사력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았던 관계로 자연스럽게 의병운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면서 연해주로의 망명이민이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병한 이후엔 그 수가 더욱 증가하였다.

연해주에서의 의병운동은 1905년 간도의 관리사였던 이범윤이 연해주의 노우오키예프시크에 창의회를 조직, 청년을 모아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군 지휘관과 교관 등을 양성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1910년 6월 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로워지자 러시아 여러 곳에서 활동하던 의병 대장들이 모여 ‘13도 의군’을 조직하고 '13도 재소동포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문을 반포하 였으나 아쉽게도 러시아에 의해 13도 의군은 해산되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소식이 전해지자 러시아 한(韓)인 대표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모여 한일합방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한국독립 선언서를 작성하여 미국 국무장관 에게 발송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러시아의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다.
1911년 5월 한인 대표들은 대한 독립을 위한 보다 장기적인 대책을 세우 기 위하여 블라디 보스토크 신한촌에 다시 모여 권업회를 조직한다. 권업회 는 말 그대로 회원들간의 상부상 조를 통하여 회원들의 사업을 도와주는 것이지만 실제 회원들과 일반인에게 애국심을 고취 하여 독립운동의 기금을 마련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1914년 이상설을 통령으로 그리고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하는 대한광복군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는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보다 5년 앞서 발기된 해외 최초의 망명정부라는 측면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韓)인들에게 가장 큰 변화를 준 것은 1917 년에 발생된 러시아 혁명이다. 1917년 2월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러시아에 서 공산 혁명이 발생하여, 전 러시아는 혼란의 와중에 몰입되고 특히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연해주지역에서는 그 혼란이 더욱 심하였다. 당시 연해주를 포함한 러시아의 극동지역은 혁명군과 반혁명군이 뒤섞이고 외국 군 대(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마저 주둔해 러시아 극동지역은 혼돈과 전쟁의 와 중에 놓이게 되었다. 한(韓)인들은 '전러한족회중앙총회'와 '한인사회당' 등 을 조직하여 이러한 변화의 물결을 맞고자 시도하기도 하였다.
만주 청산리 대첩이후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일본의 신한촌 습격 등으로 항일 조직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의용군을 비롯하여 무장 유격대를 조직하여 러시아 적군과 힘을 합 쳐 피나는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14년까지 약 60,000여 명의 한인이 연해주로 이주했으며, 이 시기 이주민의 상당수는 의병이었다. 러시아 혁명이후 러시아의 한(韓)인 입국 불허 정책에도 불구하고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韓) 인들은 계속 늘어났다. 특히 한반도를 떠나 만주에서 무장 항일 투쟁을 하였던 독립투사들이 1920년 만주 청산리 대첩이후 대거 연해주로 이동함으로써, 1915년까지 단지 63,000명에 불과하였던 한(韓)인의 수가 매년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하여 1923년 약 107,000명, 1925년 약 120,000명이 연해주 에 거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연해주는 명실상부한 항일 무장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919년 이후의 러시아 이주는 생계 목적의 '농민 이주' 성격보다는 항일 무장 투쟁을 목적으로 연해주로 이주하는, 즉 '망명 이주' 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2)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한(韓)인들

러시아의 한(韓)인에 대한 정책 변화는 1922년 10월 25일 러시아 극동 지방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러시아 적군은 선언적인 차원이기는 하지만 내전과정에서 당면한 백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한(韓)인들의 협력을 구하였으며 한(韓)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약속은 일본군이 극동에서 철수하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점차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소련 정부는 이미 1922년 말부터 극동지방으로부터 한(韓)인을 타지방으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비록 적·백간 내전에서 소비에트 에 혁혁한 기여를 하기는 하였지만 복잡한 토지 문제를 비롯하여 안보 문제를 놓고 생각하더라도 이민족인 한(韓)인은 여전히 미덥지 못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2년에 진행되었던 이주 계획은 한인 사회의 강력한 반발, 그리 고 대규모 이주 계획을 추진하기에는 아직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충분한 여건이 마련되지 못한 까닭에 실제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1931년 일본군이 남만주에서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1932년에는 만 주국을 세웠으며,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넘보기 시작하면 서 한(韓)인 이주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937년 후반에 들어서는 일본군이 연해주 침략을 위해 한(韓)인들을 첩자로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았으며, 아시아에서 위기를 느끼고 있었던 소련은 극동지역에서 일본과 전쟁을 할 경우, 이 곳의 한(韓)인들은 일 본을 지원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韓)인들에 대한 강제 이주의 필요성을 느낀 소련은 1937년 8월 21일 중국과 소­중 불가침조약을 체결했고 같은 날 소련인민위원회와 소 연방 공산당은 스탈린과 모로토프의 명의로 ‘극동지방 국경부근 구역에서 한(韓)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No.1428-326)을 발표하였다. 12개항으로 된 이 명령서는 공산당 극동지방 위원회와 내무 인민위원회 극동지방 관리국이 주체가 돼 연해주 지방 특히 국경지방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킬 것을 명한 것이다. 이 명령서는 강제이주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면서 가능한 재산과 가재도구 등 을 가져갈 것, 이주자의 동산과 부동산 그리고 경작지를 보상하여 줄 것, 외국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자는 보내줄 것, 소요에 대비할 것, 적시에 차량 을 제공할 것, 퇴거지에서 3일 내로 보고할 것, 출발과 도착 그리고 외국 에 나간 자들을 10일 마다 보고할 것, 한(韓)인 이주 시작한 곳에 수비군 3,000명을 배정할 것, 그리고 한(韓)인이 살던 곳에 수비병을 거주케 할 것 등을 지시하고 있었다.

이 명령서에 의거하여 1937년 9월 1일 연해주의 한(韓)인들은 단지 먼 곳으로 이주할 것이니 준비하라는 통지만 받은 채 화물열차를 타고 약 6,000 ㎞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포시에트를 위시한 국경지역에 서 출발한 제1진은 41열차에 12,144세대 59,723명이 출발하였으며, 제2진은 9월 29일 하바로프스크, 유태인 자치주,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떠났다. 10월 3∼4일에 출발한 제3진은 연해주 지역에 남아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다 싣고 떠났다. 1937년 10월 25일 운송책임자 에조프가 몰로토프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124개 열차에 36,442가구 171,781명이 이주를 했고 극동지역 캄차카 오호츠크 등에 남은 700여 명을 추가 이주시킬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가축이나 곡물, 석탄 등을 운반하던 화물 기차를 개조하여 만든 열차에 한(韓)인들을 승차시켰는데, 이 차량에는 화장실, 수도시설을 포함하여 어떠한 위생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매 차량에 4세 대씩 나누어 타고 이주하게 된 한(韓)인들은 열차 속에서 밥을 짓고 용변 을 보는 등 각종 악취와 굶주림 그리고 추위에 시달리며 목적지도 모른 채 한 달 이상을 열차에서 시달렸다. 특히 한(韓)인들은 열차의 짧은 정차 시간을 이용하여 물과 식수를 얻을 수밖에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어린이와 노인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동 도중에 아이들 사이에 홍역이 발생하여 유아 사망률이 약 60%를 상회할 정도였다. 또한 이동 중에 가족이 여러 열차로 흩어져 이산 가족도 다수 발생하였으며, 열차 충돌 사고도 발생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의 강압에 의해 중앙 아시아로 이주된 한(韓)인들은 대부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많이 이주했다. 공식적인 보고에 의하면 우즈벡 공화국에 16,272가구 76,525명, 카자흐 공화국에 21,070가구 95,256명이 이주했으며, 그 밖에 레닌그라드 등 여러 지역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한(韓)인들에게 새로운 정착지의 상황은 더욱 더 막막하였다. 1938년도의 인구표본조사를 보면 1,000명당 42명이 사망했으며 유아사망률도 20%나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어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한(韓)인들은 굶주림, 궁핍, 그리 고 죽음과 싸워야 하는 힘든 생활을 하였다. 특히 고통스러웠던 기간은 이주 첫해 겨울부터 이듬해 농사를 짓기까지의 기간이었는데, 당시 한(韓) 인 일부만 임시 주택과 가건물에서 생활하였을 뿐, 대부분의 한(韓)인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토굴이나 창고, 마굿간 등을 개조하거나 갈대로 움막집을 짓고 겨울을 나야 했었다.
한(韓)인들이 도착한 중앙아시아는 여름에는 40℃를 오르내리고 겨울에는 영하 40℃까지 떨어질 정도로 연교차가 매우 심한 대륙성 기후가 나타나며, 강우량도 비교적 적어 전통적으로 유목이 발달한 지역이다. 이러한 기 후 조건을 갖춘 중앙아시아는 비록 여름에 강수량이 적고 일사량이 많은 건조 지역이지만 농업 용수만 풍부할 경우 벼농사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더욱이 한(韓)인 촌락은 시르다리야강, 아무다리야강, 일리강, 카다말강 등 관개가 가능한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오랫동안 선조로부터 체험을 통하여 벼농사 재배 방법을 익혀 알고 있었던 한(韓)인들은 농업 용수를 찾아 연해주에서 가져간 삽·괭이·호미는 물론 심지어 수저 막대기까지 동원하여 운하를 만들고 논을 일궜다. 그리고 토양의 염분을 제거한 이후, 연해주 지방에서 가져간 쌀을 심었다.
중앙아시아에서의 초기 농업은 논의 높은 수온(35∼40℃), 파종 방법의 차이, 농기구 및 가축 이용 부족 등으로 대체로 순조롭지 않았으나, 한(韓) 인 특유의 근면과 성실로 마침내 중앙아시아에서의 벼농사에 성공했다. 중앙아시아에 버려진 한(韓)인이 벼농사에 성공하여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중앙아시아에서는 '한(韓) 인'하면 '쌀'을 연상하고 '쌀' 하면 '한(韓)인'을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

한편 일본에 반항하기 위하여 일본과 싸운 한(韓)인들의 의병활동은 소련인의 눈에는 일본을 위한 스파이 행위로 해석돼, 결국 한(韓)인들은 이른바 소련의 적성민족이 되었다. 적성민족으로 낙인찍힌 한(韓)인들은 특별주민 에 해당되어 지정된 구역 이외에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국가 안전기관·내무 기관원들의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 한 이후 많은 한(韓)인들은 소련군에 지원하였으나 소련 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에 탄광이나 금속 공업, 기타 중요한 전략사업에 투입하면서 추방자 혹은 죄수 취급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한(韓)인 차별정책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한인들은 오로지 소련의 대 전통인 러시아어를 빨리 익히고 러시아 문화를 습득하여 주어진 조건에서 최대의 성의를 표시함으로써, 소련이 말하는 이른바‘신소련인’ 이 되는 것만이 오직 살길이었다. 그리고 농촌에 배치된 대부분의 한(韓) 인들은 집단 농장(콜호즈)에서 특유의 개척 정신과 영농법으로 다른 민족 이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수확을 올렸으며, 이 과정에서 김병화, 김만삼, 황만금 등 수 많은 '노동영웅'을 많이 배출하기도 하였다.
한편 연해주에서 이주한 한(韓)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정착하면서 겪었던 문제 중 하나는 역사와 전통이 다른 우즈벡인, 러시아인, 카자흐인 등의 이 질적인 문화와 생활 관습에 적응, 융합하기 어려웠던 점이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은 게으르고 보잘것없는 유목 문화와 유목 민족 특유의 불결한 주거 환경, 그리고 일부다처제 등 당시 한(韓)인으로써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 민족들보다 우수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한(韓)인들은 이들과 이웃하여 살면서도 이들과 혼인을 하지 않았고 그들의 문화를 모방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 한(韓)인들에게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바로 언어 장애 문제였다. 대부분의 한(韓)인들은 언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저임금 노동을 하는 수밖에 없었으며, 심지어 죽음에까지 초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 고 1938년 한국어를 소련의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연해주에 서 중앙아시아로 이동한 한인학교 모두가 폐쇄되어 결과적으로 후세들에게 정상적으로 한글 교육을 시킬 수 없었다.

3)사할린으로 이주한 한(韓)인들

사할린은 러시아의 연해주 동쪽 그리고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 위치한 섬으로, 겨울이 길고 몹시 추워 단지 유배지로 여길 만큼 사람이 살기 어려 운 섬이다. 1875년 러시아와 일본과의 조약에 의해 러시아의 영토로 확정되었던 사할린은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사할린 남쪽을 일본이 점령하게 되었다.
1897년 사할린에는 불과 60여 명(당시 사할린 인구 28,000명)의 한(韓)인 이 거주하였으나, 일제시대부터 석탄 광산의 광부 혹은 단순 육체 노동자로 이주하면서 사할린 거주 한(韓)인들의 수가 증가하여 1934년에 5,813명 에 달했다.
한(韓)인들의 사할린 이주는 일본이 중·일 전쟁,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면서 모집 동원(1939), 관주 조직 동원(1942), 국민 징용·징병령 동원(1944)으로 일본에 의하여 강제 동원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사할린에 강제 동원 된 한(韓)인들은 주로 탄광에서 근무했는데, 마치 노예와 같은 생활을 연상 할 만큼 작업 환경이 비참했다. 1945년 해방되던 당시 사할린에 한(韓)인이 몇 명이었는지는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대략 43,000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은 소련 과 협상하여 사할린에 있는 일본인(일본인 368,000명, 일본군 20,000명)을 일본으로 귀환시켰으나 한인은 귀환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 후 일본인 처를 둔 한(韓)인들은 민족적 수모를 당하면서 일본인 부인의 귀환에 편승해 사할린을 떠났다. 1957년∼1960년 사이에 일본 부인(592명)을 따라 일본으로 귀환된 한(韓)인은 단 442명(자녀 1,260명 포함)에 불과했다.

한편 1946∼1949년에 사할린에는 북한에서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5,174세 대, 20,891명)이 계약 이주하였는데, 대부분 수산업, 벌목, 제지공장 등에서 노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2,274세대, 약 8,500명)는 계약 기간이 완료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할린에서 살고 있다. 또한 사할린에는 한(韓)인의 교육과 지도를 위해 중앙아시아에서 약 2,0 00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사할린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공산주의를 모르는 한(韓)인들을 교육하고 소련인과의 통역을 담당하는 등 한(韓) 인과 소련인 사이에서 주로 활동했다.

사할린에 거주하던 한(韓)인들은 대부분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국 적이 없을 경우 공산당에 가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학은 물론 직업학교, 소년훈련소에도 입학할 수 없고 연금법, 장애자 혜택, 생명보험들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등 여러 측면에서 불리했었다. 이에 따라 소련 국적을 취득하는 사람들이 매년 200∼300명씩 증가했다. 1958년 7월 국적취득 희망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소련 국적을 원하는 사람이 1,008명, 북한 국적 을 희망하는 사람이 6,346명, 그리고 무국적을 희망하는 사람이 15,909명이었다. 무국적으로 있기를 원하는 한인은 대부분 남한 출신으로 언젠가는 한국으로 귀국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처를 따라 일본으로 귀환된 한(韓)인들은 박노학을 중심으로 1966년 ‘화태억류귀환한국인회’를 조직하고 귀국을 희망하는 한(韓)인 7,000명의 명단을 입수해 일본, 한국, 그리고 소련 정부에 발송하고 귀국 조치를 호소했다. (한인들은 크게 3종류로 나눈다. 사할린 출신을 ‘화태(樺太)캄, 중앙 아시아 출신을 ‘큰땅캄, 그리고 북한 출신을 ‘북선캄'이라 부른다)
1980년대 이후, 사할린 한(韓)인을 일본으로 초청함과 동시에 한국에서 그의 가족을 일본으로 초청해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뤄지도록 했다. 그 후 1989년 6월 한국 국회의 통일외교위원들이 한국 최초로 사할린을 공식 방문했으며, 같은 해 9월 서울에서 개최된 한민족체전에 사할린에서 189명의 노인이 서울에 왔다. 이들 사할린 노인들은 조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지 45년만에 꿈에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은 것이다.

(2)중앙 아시아의 변화와 한(韓)인들의 선택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면서 연해주 한(韓)인들이 강제로 이주되었던 중앙아시아에 새로운 정치적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즉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다투어 독립을 선언하고 민족과 국가 재건에 전념하고 있었다. 한 (韓)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우즈벡 공화국과 카자흐 공화국도 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들 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처음 착수한 것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러시아 역사에서 반역자로 취급되던 자기 민족의 영웅이 이 제 국가의 영웅으로 추대됨과 아울러 도시의 광장이나 거리에 붙였던 레닌 거리, 스탈린 광장 등을 자기 민족의 영웅 이름으로 대체하였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독립정신을 도모하기 위하여 종교의 부활을 서두르고 있다. 실제로 '회교민족주의의 부활'이 라는 일반적인 현상 속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행위가 산발적이나마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언어 문제와 관련된 구조적 불평등 요인까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먼저 구조적 불평등 요인으로서 언어 문제를 살펴보면, 각 민족 공화국들 이 주요 민족의 언어(우즈벡 어, 카자흐 어 등)를 러시아어 대신 공화국내 공식 언어로 채택함에 따라 여러 소수 민족들은 민족간 교제언어로서 러시아어와 공화국내의 공식언어로서 주요 민족어, 그리고 자기 민족어를 습득해야 하는 3중 언어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거주국의 민족어를 모르는 소 수 민족들은 단순히 언어의 차원을 넘어 모든 면에서 차별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즉 사회·경제적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한(韓)인 2·3세들은 높은 교육열로 고등교육을 받아 대부분 변호사, 의사, 대학교수, 기술자, 공산당 간부 등 주로 화이트칼라 직에 종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직업은 언어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 한(韓)인들이 거주국의 민족어를 배우지 않을 경우 불가피하게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장애에 부딪칠 수밖에 없으며 대학입학, 취직, 승급에서도 차별 대우를 받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들 한 (韓)인들이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계속 직업을 유지하면서 살려면 반드시 그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중년이 넘은 사람이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는 것도 문제이지만 특히 자존심이 강한 한(韓)인들이 심리적으로 그 동안 무시하였던 민족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 요인에 더해 중앙아시아 한(韓)인을 위협하는 또 다른 요인은 회교근본주의에 입각한 자기민족중심주의의 확산과 노골적인 적대감의 표시가 그것인데, 이는 때때로 폭력의 형태를 띠고 있어 위기감 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韓)인들은 러시아인, 독일인, 유태인 등 여러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수가 이 지역을 떠났으며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韓)인의 이동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반적으로 이주자 다수가 러시아로 향하고 있으며, 그 중 일 부가 연해주로 재이주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라별로는 타지키스탄 한(韓)인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이 지역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며, 급진파가 상대적으로 강한 우즈베키스탄 한(韓)인이 카자흐스탄 한(韓)인보다 더 많이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연해주 재이주자 중에도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출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어느 정도 삶의 기반을 갖추고 생활을 하던 우리 동포들 은 독립 공화국들의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정책으로 발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이것을 표현할 길이 없는 매우 딱한 입장에 처해 있다.


조선족 이민 동포 역사

현재 중국에는 2,043,578명(외교통상부, `98. 7 기준)의 한(韓)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조선족’이라 불린다. 중국 조선족들은 중국내의 55 개 소수 민족 가운데 12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민족으로, 중국의 소수 민족정책으로 길림성에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이 있으며 그 밖에 많은 자치향을 갖고 있다.
중국 조선족은 구소련으로 이주한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이념의 장벽으로 인해 한국과의 교류가 불가능했었지만 오늘날 중국과 한국과의 가교역할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오늘날 중국 조선족의 분포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한(韓)인의 중국으로 이주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 조선족의 형성과 발전 과정 측면에서, 조선족의 이동은 대체적으로 3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한일 합병》에 이르는 제1단계에서는 주로 생계를 위협받던 농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중국 동북 지방으로 이주하였던 시기였다. 《한일 합병》부터 《만주 사변》에 해당되는 제2단계에서는 나라 잃은 슬픔을 벗고 항일 운동을 하기 위하여 애국지사 중심의 망명 이민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시기였다. 제3단계는 《만주 사변》부터 《일본 항 복》에 해당되는 시기로, 일본과 만주국이 만주로의 한(韓)인 이주 정책을 공동 추진함으로써 생활이 빈곤한 한(韓)인들이 만주로 이주되었다. 그리고 《중국 공산화》이후에 귀국하지 못한 한(韓)인을 중심으로 동북 3성에 조선족 자치주가 형성되면서 오늘날 중국 조선족 분포가 거의 형성되었다.
이처럼 한(韓)민족의 중국으로 이주는 농업 이민에서 망명 이민, 반강제 이민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중국 조선족에 이르게 되었다.

1)제 1 기 : 생계 목적의 농민 이주 (19세기 중엽∼한일 합병)
청나라는 청 태조의 발상지인 백두산 이북 일천리 지역을 성스러운 지역으로 지정하는 이른바 봉금령(封禁令,1628∼1875년)을 선포함으로써, 어떠한 사람도 이 지역으로의 이주와 개간을 금지하여 왔었다.
19세기 중엽이후 청나라에서 혼강(渾江) 유역 벌목사업에 한(韓)인을 고 용하면서부터 한(韓)인들은 만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 한(韓)인 들은 벌목을 하는 한편 강 유역의 비옥한 땅을 개간하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1860년대 한반도 지역에서의 연속된 흉년으로 주민들의 생활이 곤란하였으며, 특히 토지가 척박한 함경도·평안도에서는 그 피해가 엄청났었다. 그리하여 많은 한(韓)인들이 청나라 관리 몰래 잠입하여 봄에 씨를 뿌리고 돌아왔다가 가을에 가서 수확하거나, 아침에 들어가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사례가 늘어나는 등 만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으며, 특히 한국에서의 기사년(1869) 대흉년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때를 전후해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의 만 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韓) 인들의 거주가 본격화되었으며, 189 7년에는 약 87,000여 명(8,722호)의 한(韓)인들이 통화, 환인, 곤전, 흥경 등지에 28개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1860년 베이징(北京)조약에 의해, 연해주를 러시아에 넘겨준 중국은 러시아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봉금령을 해제하고 두만강 이북 길이 350 km, 너비 25km의 화룡욕 지구를 한인 개간구역으로 지정하여 한(韓)인의 이주 및 황무지의 개간을 장려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한(韓)인이 북간도, 즉 현 재의 연변(延邊)으로의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이 때부터 한(韓)인들은 만주에서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시작하였으며, 특히 연길현 청평 일대와 해 란강 세전벌을 중심으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인 또는 만주족만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한 (韓)인들은 아무리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과 밭을 만들어도 개간한 땅을 이 들에게 빼앗기고 3∼4할의 소작료를 지불하는 이외에 지주의 집에 가서 나 무를 하고, 집 수리하는 일이며 짚을 썰어주는 일 등 머슴과 같은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관청에 민회세, 수리세, 소세, 소금세, 문턱세, 굴뚝 세 등 각종 세금을 감당해야했으며, 심지어 청국식 머리를 하고 청국식 옷 을 입으라고 강요 당할 만큼 초기 이주자들의 생활은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범윤(李範允)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 포병대 및 지방 자치 행정 단위를 조직하여 간도의 한(韓) 인들을 박해하던 청나라에 대항하 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9년 일본과 중국 은 한(韓)인들이 두만강 북안을 개간할 수 있도록 허용하며 이들 한(韓)인 에 대하여 중국인과 같이 취급할 것과 한(韓)인의 국경 왕래를 자유 로이 할 것 등을 명시한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일방적으로 체결함으로써 간도 지방에 대한 조선 정부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편 간도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의 의병활동을 저지하던 일본은 조선통감부 간도출장소에 재판권까지 부여함으로써 한(韓)인들을 수시로 검문하고 처형하였다. 이에 대항해 만주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 다 집단적인 저항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韓)인들의 이주는 매년 증가하여 1894년까지만 해도 78,000명이던 한(韓)인 인구가 한일 합방을 당한 1910년에 109,000명을 돌파하면서 1904년에는 50,000명을 돌파하였고 1910년에는 100,000명(당시 간도 인구 약 130,0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2)제 2 기 : 항일 목적의 애국 지사 이주(한일 합병∼만주 사변)

농민들 사이에 끼어 간혹 이루어지던 항일 애국지사의 만주로의 이주는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조선이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할 때부터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 당하자, 많은 한(韓)인들 은 만주로 본격적으로 이주하였으며, 이러한 행렬은 일본의 무단 통치가 실시되었던 1919년 3·1운동직후까지 계속 이어졌다.
초창기에 만주로 이주한 항일 애국지사들은 즉각적인 항일 투쟁보다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통하여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고양하는 방법 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이상설, 이동녕, 여준 등이 용정에 세운 서 전의숙(瑞甸義塾)을 비롯하여 창동학교, 광성학교, 명동학교, 중동학교, 길신여학교, 봉명학교 등이 건립되었으며, 종교단체에서 세운 학교들도 많이 있었다. 이러한 학교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한국의 얼을 심어 주고 애국심 을 고양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며,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군인을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그러나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을 계기로 애국지사를 비롯하여 반일 감정을 지닌 수많은 한(韓)인들이 대거 만주로 이주해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 1920년대 초반에 대대적인 무력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대한 독립군, 북로 군정서군 등의 독립군 부대들이 봉오동·청산 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항일 독립군은 목숨 건 투쟁을 하였으며, 대부분의 한(韓)인들 또한 이들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하다 일본의 학살 과 방화로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청산리 전투에서 의 패전 소식을 접한 일본군은 교회뿐만 아니라 민가에 방화하고 파괴하며 독립운동가 만이 아니라 한(韓)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등 만주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에게 큰 피해(사망자 약 3만여 명, 가옥 소실 6천여 채)를 주었다. 이것을 '경신년(庚申年) 대토벌' 또는‘간도 대토벌’이라 한다.
한편 일본은 만주에 거주하는 한(韓)인에 대해 더욱 강경하게 통제하고 의병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미쓰야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 의해 만주 거주 한(韓)인들은 무기 휴대가 금지되었 으며, 중국인에 의해 한(韓)인들의 활동이 감시 받게 되었다. 또한 일본은 한국교민관리규약 을 발표하고 한(韓) 인들에게 교민증서를 발행, 신원을 파악함으로써 한(韓)인들의 반일활동 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중국 동북 지방으로 이주하는 한(韓)인은 매년 증가하여 1920년에 459,400명, 1930년에는 630,982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한 (韓)인의 64.9%인 409,402명은 연변의 4개 현(화룡, 연길, 왕청, 훈춘)에 집중되었고 연변 이외의 지역으로는 안동·통화 지역에 50,545명, 봉천·철령 지역에 97,169명, 길림·장춘 지역에 24,157명, 북만 지역(흑룡강에 속함)에 44,463명, 여순·대련 지역에 1,747명, 그리고 기타 지역에 약 1,000명 내외 의 한(韓)인들이 거주하였다. 위의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길림성 연변지 역은 이미 한(韓)인의 주요 거주지가 되었으며, 요녕성 및 흑룡강 지역에서 도 한(韓)인들이 서서히 집중되고 있었다.

3)제 3 기 : 일본에 의한 강제 이주(만주 사변∼일본 항복)

《만주 사변》이후,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한 일본이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실질적으로 만주를 통치하게 되자, 이 곳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은 지하활동을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만주의 황무지 개간 및 한(韓)인 공산당 중심의 지하활동을 감시할 목적으로 한반도에서 파산된 농민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 사업을 보다 계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와 만주국이 '재만조선인지도요강'을 합의하였으며,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만족조선족개척주식회사(滿鮮拓植會社)》를 설립하였다. 또한 동북지역의 39개 현을 조선족의 《이민구》로 확정하고 1939년부터 매년 조선으로부터 파산된 농민을 본격적으로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따라서 일본과 만주국은 1938년 7월 이민사무 처리위원회을 설치하고 총 독부가 발행하는 이주증명서를 소지한 자에게 만주 정부는 알선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지원을 하는 등 한(韓)인의 만주 이민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주 계획에 의거하여 한(韓)인들은 1938∼1939년 간도와 랴오닝(遼寧)성 일대에 처음 이주했으며, 1940년에 이르러 눈강, 룡진 등지에 이주해간 한 (韓)인만도 2,810호나 되었다. 더우기 1941년 이후 일본 식민당국은 《이민개척단》을 만들어 북만주와 내몽골 지역으로 이주를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 의해 강제 이주된 한(韓)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들로 약 14 -15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에 일본의 강제이주이외에도 자발적으로 중국에 온 사람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1937년 《중일 전쟁》이후, 탈출한 일본 군인(한인 출신 )들과 각종 단체의 책임자, 그리고 상인을 포함하여 약 3만여 명의 한(韓) 인들이 자의적 선택에 의해 중국의 화북, 화중, 화남 등 여러 지역으로 이주를 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 의한 한(韓)인의 강제 이주를 포함한 만주 지역으로의 한(韓)인 이주는 매년 증가하였으며, 1945년 해방 직전(1945. 6. 1.)에는 약 2,163,115명의 한(韓)인이 만주를 비롯한 중국에 거주하였다. 이 규모는 당 시 한반도에 거주하던 인구의 약 10%에 해당되는 것이며, 실제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한(韓)인이 중국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제 4 기 : 안착기(중국 공산 정권 수립 이후)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당시, 중국에는 약 200여만 명 정도의 한(韓)인들 이 거주하였지만, 이중 약 70여만 명만 독립된 조국으로 귀국했다.
한편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하고 일본의 괴뢰정부였던 만주국이 소멸되자,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군간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면서 만주지 방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당시 대부분 가난했던 한(韓)인들은 중국 공산당을 지지, 국민당 정부에 맞서 싸워 중국 공산국가 건설에 기여했다.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중국 정부는 이러한 한(韓)인들의 공헌을 인정하여 연변에 조선족 자치주와 대학의 설립을 허용해 주었다.

(2) 중국 한인(조선족)의 분포와 그 특징

중국에서 공식적으로‘조선족’이라 불리는 한(韓)인들은 중국 55개 소수 민족 가운데 12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민족으로, 중국 26개 성과 3개 시 어느 한 곳에도 한인이 거주 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중국의 소수 민족정책으로 길림성에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이 있으며 그 밖에 수많은 자치향을 갖고 있다.
중국 조선족이 거주하는 곳을 크게 '집거 지구(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산재지구(연변이 외의 지역)’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체 중국 조선족의 절반이상(약 58%)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이외의 지역, 즉 산재지구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 산재지구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보면 흑룡강성에 452,633명이고, 길림성에 361,235명, 요령성에 231,462명, 내몽고자치주에 22,641명, 북경시에 11,848명, 하북성에 6,250명, 산동성에 5,953명, 상해시에 1,334명이고 기타 다른 지역에 25,563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통계를 통하여 알 수 있듯 이 길림성, 흑룡강성, 그리고 요령성 등 이른바 동북 3성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특히 동북 3성 한(韓)인들의 거주와 분포에는 마치 한반도를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인구분포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반도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함경북도 대안인 연변 지역에는 함경도 사람이 다수 거주하며 평안북도 대안인 요녕성에는 평안도 출신이 대부분이며, 지리적으로 먼 흑룡강성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것은 지리적인 조건과 조선족의 이주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하겠다. 즉 연변에 함경도 사람이 많고 요녕성에 평안도 사람이 많은 것은 초기에 이주한 한(韓)인들이 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흑룡강성에 남한 사람이 많은 것은 만주국 시대 일본의 강제이주에 의하여 개척 농장으로 이주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의 거주상의 또 다른 특성은 연변자치주 집거 지구와 같이 한 곳에 집중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중국 조선족 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은 조선족의 벼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인들은 이주하여 정착할 때, 논 관개와 개발에 유리한 하천 유역과 평원 지역을 찾아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특히 동북 3성 지역의 조선족들은 옥수수와 야채를 재배하는 중국인과 달리 벼농사를 주로 하기 때문에 물이 풍족한 평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은 벼농사 지역이외의 지역에서도 집거하는 사례가 있다. 예를 들면 요령성 수도인 심양에서는 서탑지구에 집결해 한인타운 을 형성하고 있고, 길림성에서도 장춘시의 상해로 부근과 천진로 부근에 집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 조선족들이 대도시에서도 특히 역 가까운 곳에 집단 거주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는 1940년대 후반 중국이 해 방 전쟁을 하던 혼란한 시기에 중국 조선족들이 만약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경우 단결하여 빨리 도망갈 수 있은 곳, 즉 철도 교통이 편리한 곳을 중심으로 집단 거주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3) 중국 조선족의 공헌

중국 조선족은 1998년 현재 약 200여만 명으로 이것은 해외로 진출한 전 체 한민족(韓民族) 약 560여만 명의 36%에 달하는 수치이다. 이들 중국 조선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한(韓)인들과 다른 이주 역사와 생활 환경을 갖고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중국에 많은 공헌을 하였기에 오늘날 '자랑스러운 한인(韓人)' 으로 인정받으면서 거주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은 만주·몽골 족과 같이 알타이어족에 속하지만 유목이 아닌 농경 특히 벼농사를 비롯한 수도작 농업을 경영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양자강 이남에나 벼농사가 가능하고 양자강 이북은 밭농사 지대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은 벼농사가 불가능한 지대라 생각되어 왔던 동 북 3성으로 생활의 터전을 확대해 가면서 중국인이나 만주인이 밭농사에 불리하여 버린 늪지를 논으로 개간하고 벼농사를 전파하여 중국에 큰 공헌을 한 민족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韓)인들이 중국에 끼친 공로의 하나는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당시 조선족은 나라 전체를 일본에게 빼앗긴 상태였기에 일본에 대하여 중국인의 수십 배, 수백 배 되는 적개심 및 저항 정신을 가졌으며, 따라서 한(韓)인들이 중국에서 전개한 항일 전쟁은 일본과 전쟁을 치루고 있던 중국인의 몇 배 되는 강한 항전이었다. 이와 같이 중국 동포들의 항 일 전쟁은 중국내의 어느 소수민족도 수행하지 못한 한인들만의 공헌이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이 중국을 위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당 군대와의 치열한 전투에서 공산당을 지원한 점이다. 당시 중국 조선족이 공산당의 해방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것은 살아 남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으나 이것보다는 항일 전쟁의 연장선에서 생각하고 항일 전쟁의 동지를 돕는다는 생각이 더 강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기야 어떠하든 결과적으로 중국 조선족은 중국 공산당의 해방 전쟁에 어느 소수민족 못지 않은 크나 큰 공헌을 하였다.

(4)연변 조선족 자치주

중국 조선족이 세계에 흩어진 우리의 어느 한민족(韓民族)보다 뚜렷한 민족 의식을 가지고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변 자치주' 라는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만강과 접하고 있는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길림성의 1/4(면적 42,700 ㎡)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1952년 자치주로 성립될 당시 2시 6현으로 이루어졌으나 그 후 행정구역이 바뀌어 현재는 6시 2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1952년 자치주가 성립될 당시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다른 20여 개의 소수 민족을 포함하여 총 926,207명이 거주하였으며, 그 가운데 조선족이 557,2 79명으로 전체 인구의 60.2%를 점하였다. 그러나 조선족의 연평균 인구성장률(1,5%)이 중국 연평균 인구성장률(1.8%)보다 휠씬 낮기 때문에 연변조 선족 자치주에서 차지하는 조선족의 인구 비중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추세이며, 1990년 현재 조선족은 전체 인구의 약 39.5 %(한족 약 57%)에 해당되는 821,479명이 거주하고 있을 따름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 지구로,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약 42%를 차지하고 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의 조선족 인구 분포를 살펴보면, 용정시 183,994명, 연길시 177,547명, 화룡시 136,8 94명, 훈춘시 92,100명, 왕청현 85,049명, 도문시 69,166명, 안도시 24,745명 등이다.
비록 조선족이 연변조선족 자치주 전체 인구의 약 40%에 불과하지만 이 곳은 조선족 자치주이기 때문에 조선족이 주된 민족으로 인정되며 따라서 조선어(한국어와 동일한 개념)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지리적으로 백두산 북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남에서 북으로 갈수록 지표면이 낮아지며 백두산 산맥의 수없이 많은 구릉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곳이므로

결코 농업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은 아니다.
중국 조선족들은 다른 민족에 비하여 민족 결속력과 응집력이 매우 강하 여 아직까지 우리 고유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살펴 볼 때, 중국 조선족의 마음의 고향이고 문화의 원천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 바로 '연변자치주' 이다. 즉 연변자치주에서 조성된 민족의식은 중 국 전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새로운 활기를 부여하여 한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중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북한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살 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 그리고 분단된 남북한과 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는 면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재 중국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연변은 중국 전체로 말하자면 동북의 산간지대 구석진 곳에 위치한 하나의 행정조직에 불과하다. 하지만 ‘유 엔개발계획(UNDP)’에서 추진하는 두만강 개발이 완료돼 두만강 하류가 동북아시아 물류의 중심지가 된다면, 연변은 동북아시아와 중국의 또 하나 의 상해가 될 것이며 이때 연변은 오지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와 동해의 중심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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