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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여행학교/제3기 세계로 여행학교

[제3기 세계로여행학교 기행문 ⑤]

함양고1 김은민

 

-사전교육-

1230. 드디어 방글라데시와 네팔로 떠나는 날이다. 부모님과의 모든 이별을 마치고 315,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출발부터 심상치 않았다. 상해로 가는 비행기가 1시간 딜레이 된 것이다. 그래도 이건 앞으로 닥칠 엄청난 일에 대한 예고에 불과했다. 그렇게 기다리면서 부모님에게 보낼 15초 영상을 찍었다. 원래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2주 동안 부모님을 안 봐서 그런지 막 슬프거나 그런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상하이 공항에서 내려서 쿤밍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는데 계속 출발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2시간을 기다리다가 방송에서 나온 말은 캔슬이였다. 쿤밍에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서 비행기가 뜰 수 없기 때문이란다. 신공항이 생기고 나서 안개가 자주 낀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린 결국, 상해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리고는 화물수하 칸에 맡겼던 짐을 찾으려는데 나머지 짐들은 다 나왔는데 내 짐만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 가지고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선규와 하언이와 같이 뛰어다니면서 사람들의 짐을 다 봤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보안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는데 그건 국제선 가서 알아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이건 동방항공 니들 책임이니 니들이 다 해결해라고 따지니까 일단 알겠다고 기다려보라고 하였다. 짐을 아예 못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계속 눈물이 눈에 맺혔다. 그렇게 한 15분 정도를 기다리자 보안직원이 내 가방을 들고 나오셨다. 김해에서 상해로 짐이 가는 과정에서 배낭이 잘 전달이 안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놀랬던 가슴을 가라앉히고, 오늘 하루는 정말 힘들게 끝이 났다.

 

 

-방글라데시-

 

여행 둘째 날,

역시나 상해에서 쿤밍으로 가는 비행기가 2시간 딜레이 되었다. 모든 걸 자포자기하고 다카행 비행기를 타려 하는데 오늘은 안되고 내일 비행기를 이용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갑자기 왜 비행기가 캔슬됐냐고 막 항의를 하고 있는데 그 때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방글라데시 정치 상황이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오늘 안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처음 우리 11명이 비행기를 태워달라고 할 때는 안 된다고 했지만 나중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항의를 하자 결국 어렵게 어렵게 다카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이런 순탄치 않은 과정을 통해 우리의 팀웍은 정말 단단해졌다. 다카 공항에 내려서 비자를 발급 받으려는데 비싸기도 비싸고 엄청 까다로웠다. 그렇게 비자도 어렵게 받은 후 김종란 선교사님을 만났다. 선교사님이 지으신 학교인 아샬로이 스쿨에서 우리가 모든 숙식을 해결한다고 하셨다. 그리곤 회의 때 들은 얘기가 우리가 영상편지 전달을 못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며칠 후면 총선이라서 시위도 많이 일어나고 정치적 상황이 심각해서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리곤 여행 셋째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친구들과 학교 바로 옆에서 배드민턴을 쳤다. 그 때 선교사님의 아들인 태희를 만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시은이와 희은이는 공항에서 짐을 찾고, 나머지는 릭샤를 타고 다시 학교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선규, 하언이, 재현이, 도연이가 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엔 조금 있으면 오겠지 싶었는데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 정말 속이 타들어갈 정도로 걱정이 되었다. 주소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모르는 애들이 방글라데시에서 국제미아로 남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30분 정도가 지나자 사라진 애들이 다 같이 들어왔다. 아이들이 들어오자마자 어떻게 된 건지 선규에게 물어보니 학교 주변에 공원이랑 비포장도로가 있는 것 같아서 대충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더 놀랬던 것은 우리는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면서 애가 타게 기다렸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별로 아무렇지 않다고 한 것이다. 길을 잃었다는 느낌보다는 방글라데시 곳곳을 구경할 수 있어서 되게 재밌었다고 한다. 선규와 하언이, 재현이와 도연이가 한도 끝도 없이 긍정적이라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 시은이와 희은이가 공항 짐을 다 찾고 나오는 과정에서 나머지 짐들은 다

통과를 했는데 책을 넣은 박스가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무지 많이 나올 세금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그 때 귀뚜라미 보일러에서 4년 일한 방글라데시 이주 노동자가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이거 그냥 책이네요? 그냥 가시면 됩니다.”

하고 우리를 보내줘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일이 정말 가뿐하게 해결됐다고 한다. 이 일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에게 우리만 항상 무언가를 베푼다고 생각했는데 이주노동자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구나! 하고 정말 고마움을 느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잠깐 모임을 가졌는데 내일 일정에 관해 대충 얘기해 주셨다. 도서관 현판식을 하고 아만의 집에 간다는 이야기였는데 아만 집에 가게 될 때 배가 부르다고 느끼면 정말 천천히 먹고, 웬만하면 거기서 주는 음식을 다 먹으라고 하셨다. 이 곳 사람들은 손님을 대접할 때 손님의 그릇이 비는 것은 정말 무례하다고 생각해서 음식을 계속 주고, 우리가 먹다 남은 음식은 그 집 사람들이 먹기 때문이다.

 

여행 넷째 날,

오전 9시에 도서관 현판식이 있었다. 각자가 들고 온 책 10권을 도서관에 기증하는 세리머니였다. 우리가 정말 무겁게 들고 온 이 책들이 아샬로이 스쿨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니 정말 뿌듯했다. 그리곤 다른 선교사님의 아들인 상화오빠를 만나고, 배가 고파서 릭샤를 타고 신가라, 셔모짜, 다양한 과자를 사 먹었는데 현지 음식도 정말 맛있었다. 오후 3, 아만 씨 집에 갔는데 가족들이 정말 친절했고, 집이 생각보다 잘 살아서 조금 놀랬다. 같은 방글라데시라도 빈부격차가 꽤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도 조금 아쉬웠던 건 풍선을 100개 챙겨갔는데 아파트라 그런지 아이들이 별로 없어서 많이 못 불어준 것이다. 그리곤 야시장에 갔는데 사람이 진짜 너무 많았다. 선교사님이 옆 사람과 대화하지 말고 한눈팔지 말라고 하셨다. 조금 무섭고 겁이 났다. 벵골 시장은 우리나라 시장과는 다르게 닭, 염소 등 가축동물을 옆에 묶어놓고 모자라면 바로 죽여서 판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이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정말 놀랐던 것은 교통질서가 진짜 말도 안 되게 엉망이라는 것이다. 중앙선도 없고 클락션도 하루 종일 울려대고. 상화 오빠를 통해 들은 얘긴데 방글라데시는 깜박이가 없고 운전면허도 필요 없고, 말 그대로 그냥 심심하면 클락션을 울린다는 것이다. 교통제도의 정비가 정말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여행 다섯째 날,

배를 탔는데 엔진 소리가 정말 시끄러웠고 3시간 가까이 달려서 정말 지루했다. 그래도 강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강물이 완전 검정색이었는데 선교사님이 이 나라는 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셨다. 그렇게 아주 큰 항구에 있는 박물관에 도착했는데 3시 넘어서 문을 연다 해서 좀 허무하고도 아쉬웠다. 무슨 박물관이 교도소처럼 되어 있었다. 거기서 정말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이들이 공사판 쓰레기장에서 성냥을 불에 붙여서 먹으면서 어른들의 담배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물도 완전 더러워진 폐수고, 어디부터 손을 대야하는지 모르겠는 나라다. 그렇게 6시간 동안 배를 탄 후에 어제 만났던 상화오빠를 비롯해서 선교사님들과 식사를 했다. 인도 음식인 달이를 먹었는데 진짜 꿀맛이었다.

 

여행 여섯째 날,

방글라데시 국립 박물관에 갔다. 제일 먼저 방글라데시의 주요도시에 관해 설명해 주셨다. 벵골의 제 1도시는 다카, 2도시는 슈타공, 3도시는 리샤이라고 하셨다. 또 실렛은 홍차로 유명하고 콕시스 바잔은 세계에서 가장 긴 백사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고 하셨다. 그 다음으로는 벵골에 있는 다양한 동식물을 봤는데 벵골을 대표하는 과일은 잭 프룻인데, 벵골은 국가 상징물이 많다고 하셨다. 또 다양한 목재들을 봤는데 벵골은 2~3년만 되면 엄청 크게 자라서 목재가 잘 발달되어 있지만 그만큼 또 뿌리는 약하다고 하셨다. 우리나라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느꼈던 부분은 이 나라의 땅은 거의 델타지역으로 퇴적물이 많아서 송전탑을 세울 수 없다고 서남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우리나라의 고려 산업이 해낸 부분이었다. 역사관도 있었는데 이 역사관을 보면서 역사를 모르는 민족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다. 박물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어서 많이 피곤했는데 점심을 먹으러 가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 제일 큰 백화점에 갔는데 약간 진주 지하상가 분위기가 났다. 그리고는 지금 수상의 아버지인 봉고본드의 생가를 구경하러 갔는데 오픈 시간이 지나서 안 된다고 하였다. 어제는 박물관을 못가고 오늘은 생가를 못가고 계속 아쉬움만 많이 남는 것 같다. 사진을 몇 장 찍고 국회의사당에 갔는데 정원도 예뻤고 건물도 되게 멋있었는데 세계의 아주 유명한 건축가가 디자인 했다고 한다. ‘국민의 대표기관이 국회가 잘 돌아가야 이 나라가 올바른 민주주의를 되찾을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피곤하고도 많이 알고 가는 하루가 끝이 났다.

 

여행 일곱째 날,

오늘이 드디어 선거일이라서 아무 이동을 할 수 없는 관계로 오전에는 모딜씨의 인생사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무슬림이었는데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가족과 친척들에게 많은 핍박을 당하고 독립운동도 하고 딸도 필리핀에서 공부하다 죽고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것 같았다. 오후에는 희은이, 하언이, 선규, 나경이만 모자멜 씨 집에 가서 영상편지 배달을 하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쉬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방글라데시에서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았었는데 정치적 상황이 심각한 관계로 기대와 달라서 정말 실망을 많이 했다.

 

 

-네팔-

 

여행 여덟째 날,

마지막으로 미션서바이벌을 했다. 나랑 재현이, 나경이는 C팀이었다. 우리 팀의 미션은 아전뿔에 갔다가 아롱샵에 가서 유학생들 선물을 사고 점심먹는 이 모든 과정을 인증샷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아롱샵에서는 유학생들 선물로 컵을 사고 팔찌를 샀는데 미션 수행할 때 받는 2000다카로 센터 인테리어 장식품을 사는 바람에 점심 먹을 돈이 모자라서 A팀한테 빌리기도 하고 딱히 재밌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서바이벌을 하면서 가장 이상했던 건 아전뿔이나 아롱샵처럼 이렇게 조그마한 백화점에서 모든 경찰들이 다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후진국으로 가면 갈수록 경찰들이 쓸데없이 많다던데 그 말이 맞긴 맞나보다. 이렇게 모든 미션 서바이벌을 끝내고 선교사님들과 태희, 학교스탭들과 작별인사를 마치고 2, 다카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역시나 또 카트만두행 비행기가 2시간이나 연기되었다. 모기가 득실득실하는 정말 작은 경비행기를 타고 카트만두에 도착했는데 수쿤다라는 삼촌이 마중 나와 계셨다. 인상이 정말 좋아보였다. 너무 배가 고픈 우리는 중국식당에서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외국인의 거리로 유명한 테말이라는 곳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이 들었다.

 

여행 아홉째 날,

포카라 근처에 있는 수니타씨 집을 향해 카트만두부터 약 6시간 차를 타고 달렸다. 가다가 조금 신기했던 건 이 나라는 우리나라처럼 마음대로 차를 타돌아다닐 수 있는 게 아니라 시를 넘어가려면 허가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큰 화물차도 알록달록 되게 하려했고 클락션이 음악소리여서 독특했다. 그렇게 수니타씨 집에 도착해서 수니타씨 어

머니를 만났는데 수니타씨랑 정말 닮았었다. 인도 나가랜드라는 곳에서 25년 살다가 네팔로 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현지 친구 2명을 사겨 수다를 떤 후에 수니타씨 엄마를 위해 시은이 오빠와 선규는 김치찌개를 준비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수니타씨 집 바로 앞에 있는 학교 친구들과 모닥불을 피우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네팔 친구들이 자기네들끼리 얘기하는 바람에 분위기는 약간 서먹해졌다. 마침내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왔고 다함께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은 후 여자아이들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일찍 잠들었다.

 

 

여행 열째 날,  

일어나자마자 시은이 오빠가 얘기하기를 옆집 모니카라는 친구가 오늘 하루 더 있게 되면 네팔음식을 만들어서 저녁을 대접해주고 뒷산 가서 동네구경을 시켜준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니타씨 집에서 하루 더 묵기로 결정하고 약 1시간을 달려 포카라에 있는 이채빈씨 집에 갔다. 그런데 가족들이 스카프를 둘러주고 이마에 티카라는 것을 발라주셨다. 손님을 접대하는 하나의 의식 같았다. 이채빈씨 집에서 아침을 먹기 전에 오빠분이 전통시장과 가옥을 구경시켜주셨다. 400년 가까이 된 집들이라고 하셨는데 집이 뭔가 섬세한 느낌이 들었고 귀신이 나올 법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이채빈씨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1시 반에 나와 호정이는 수쿤다삼촌과 페와호수로 배를 타러 가고 나머지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러갔다. 호수가 정말 끝도 없이 넓었고,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에 가보니 힌두사원도 크게 있었다. 사진 찍고 대충 구경을 한 후에 집으로 갔는데 어제 만났던 네팔 친구들이 있어서 그 친구들과 꼬마아이들과 함께 공놀이를 하였다. 한참을 논 후에 어둑어둑해져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모닥불을 피고 네팔 친구들과 얘기도 하였다. 네팔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주면 우리도 답하는 형식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어제보다 훨씬 재밌었다. 네팔 노래는 대체적으로 정말 흥겨웠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네팔 친구들이 비보이춤도 춰 줬는데 정말 멋있었다. 우리랑 같은 또랜데 비보이 춤을 잘 추는 아이들이 꽤나 많았다. 그리고 한국 가서도 계속 연락하기 위해 몇몇 친구들과 페이스북 아이디도 교환했다.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었는데 그전에 혼자사시는 수니타씨 어머니의 외로움을 덜어드리기 위해 전기가 나가도 태양열을 이용해 불을 켤 수 있는 솔라판넬을 설치했다. 어머니가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수니타씨 어머니가 수니타보고 자기도 한국 데려가 달라고, 혼자 있기 싫다고 얘기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되게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 뻔했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슬픔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다.

 

여행 열한 번째 날,

포카라에서 약 5시간 가 지 못했다. 친구들은 강에서 돌을 주우면서 재밌게 노는 것 같았다. 이 망할놈의 고소공포증!! 그리고 차량이동 시간이 길어 중간에서 내려 량을 달려 에버비전 스쿨에 계시는 선교사님을 만나러 갔다. 그 전에 긴 구름다리를 건너는 곳도 있었는데 나는 너무 무서워서 가쉴 겸 사탕수수도 사 먹었는데 굉장히 달고 맛있었다. 사탕수수를 물에 탄 것만 먹어봤지 사탕수수 그대로 먹은 적은 없었는데 정말 이건 맛의 혁명이었다. 그런데 이걸 잘 먹으려면 이가 튼튼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침내 에버비전 스쿨에 도착했는데 아이들이 줄을 서서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선교사님이 안 계셔서 전화통화를 하기를 에버비전 스쿨에 모자를 반주고 고아원에 반주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모자를 씌워 주었는데 모자크기와 애들 머리가 잘 맞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렇게 모자를 다 씌워주고 사진을 찍고 아이들과 한바탕 놀 줄 알았는데 빨리 고아원을 가자해서 아쉽기도 하고 모자만 주고 바로 가는 것 같이 미안한 마음도 많이 면서 기분도 묘했다. 그리고는 길에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와서 케어해주는 고아원을 갔는데 아이들이 무표정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그랟 다행히 선교사님은 인상이 정말 좋으셨고 진짜 좋은 분이신 것 같았다. 선교사님이 대충 고아원 소개를 하시고 아이들이 한국어로 자기소개를 하는데 되게 신기했다. 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들이 길거리에 버려져 있었다니 정말 끔찍하다. 심지어 한 아이는 신문지에 싸여진 채 버려진 칠삭둥이였다. 아이들이 너무 어두운 표정으로 있어서 우리가 풍선을 갖고 놀면서 놀아주니 정말 밝게 웃으면서 깔깔거렸다. 마치 전혀 때 묻지 않은 정말 순수하고 해맑은 표정으로..여행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여기서 모두 케어되는 것 같았다. 원래아이들을 잘 안 좋아하는데 오늘 이후로 마음을 180도 바꾸게 되었다.. 자기자식도 아니고 남의 자식 데려다가 키우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일텐데 선교사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놀다가 모모라는 만두도 먹고 과자도 먹었는데 아이들이 되게 잘 먹었다. 뱃속에서도 이렇게 잘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아이들을 처음 데려다 왔을 때 모두 2kg미만이었다고 한다. 네팔에서 가장 기억 남는 곳을 뽑으라면 당연 고아원이고 특히 순이라는 초콜릿을 정말정말 사랑하는 아이는 더더욱 잊지 못할 것이다.

 

여행 열둘째 날,

가장 먼저 꺼멀 씨 집에 갔다. 꺼멀 씨 형님들이 꺼멀 씨와 너무 닮아서 놀랬다. 아기도 정말 귀여웠다. 아직 세 살이라 낯가림이 없어서 그런지 정말 많이 까불었다. 꺼멀 씨네 가족은 대체적으로 되게 친근한 분위기였다. 마침 이 날은 희은이 생일이라 저녁에 생일잔치도 할 겸 다시 만나기로 하고 마지막 집인 비노드 씨 집으로 갔다. 비노드 씨 동생과 대화를 해보니 자기도 몇 달 뒤에 조만간 한국으로 갈 거라 하셨다. 한국어 능력인증시험도 80점대로 꽤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네팔 대기자 수가 8051명이라는 걸 듣고 정말 놀랬고 그 많고 많은 나라 중에 왜 굳이 한국을 선택하는지 약간 의문심이 들었다. 그러고는 비노드 씨 동생과 함께 바딱뿔이라는 곳에 갔는데 규모나 예술성으로만 보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만한데 그냥 사원이라서 딱히 우리의 관심이 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입장료는 15달러나 하는데 둘러볼 시간을 40분밖에 주지 않아서 많이 아쉬웠다. 그래도 사원 안에 게스트 하우스도 있고 식당도 있고 상점도 있는 건 이해가 안가기도 하면서 좀 신기했다. 그다음 코스는 화장터였는데 이 화장터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화장하는 모습을 직접 내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었고 수쿤다 삼촌의 큰아버지도 여기서 화장되셨다고 한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건 죽음 끝에 남는 건 결국 모두 다 똑같은 한줌의 재라는, 사람인생 정말 별거 없다는 걸 느꼈고 한 번 살 때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화장터를 나오면서 마스크를 낀 사람들을 봤는데 진짜 저게 개념이 있는 건지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제발 우리 한국인은 아니길 바랬는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 한국인이었다. 우리나라의 문화의식 수준이 저것밖에 안 되는 줄은 진짜 몰랐다. 아무리 재가 많이 날린다고 해도 저건 진짜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엄숙한 장소를 나오고 나서 타멜 거리를 쇼핑하러갔는데 과연 외국인 의 거리임이 실감이 났다. 팔찌 말고는 딱히 살 물건이 별로 없어서 대충 구경을 하다가 꺼멀 씨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러 차차카페라는 곳에 갔는데 꺼멀 씨의 가장 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했다. 케이크와 함께 배터지게 먹고 사진도 아마 여기서 제일 많이 찍은 것 같다.

 

 

여행 열셋째 날.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공항가기 전 마지막으로 2시간 정도 네팔에서 쇼핑할 시간이 있었다. 1시간 정도는 어른들과 같이 다니다가 나머지 1시간 정도는 우리끼리 돌아다니는 시간이었는데 우리는 조금 전에 지나쳐온 빵집 가게로 가기로 했다. 우리나라 빵과는 좀 많이 달라서 사려 했는데 직원이 달러는 못쓴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셨다. 루피가 하나도 없는 우리로서는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거 하나 사 먹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걸어왔는데..그런데 우리가 생각나는 대로 호텔로 가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정말 많은 사람에게 물어물어 길을 가다가 우리가 찾는 호텔이 카트만두 게스트하우스 옆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카트만두 게스트하우스를 찾게 되었고 바로 옆이니까 빵 정도는 사고 가도 되겠지 하고 빵을 허겁지겁 샀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우리 호텔은 카트만두 게스트 하우스 근처에 없었다. 약속 시간은 넘어가고 우리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렇게 막 길을 헤매다가 엊그제 따 놓은 수쿤다 삼촌 번호가 생각났다. 그래서 휴대폰을 빌려서 수쿤다 삼촌에게 전화를 했고 결국 호텔에 무사히 도착했다. 알고 보니 우리 호텔은 카트만두 게스트 하우스에서 무려 10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믿을게 못된다. 수쿤다 삼촌에게 정말 미안했고 전화번호 따 놓길 잘한 것 같았다. 안 그랬더라면 진짜 어쩌면 국제미아가 됐을지도 모른다. 네팔에서의 마지막 점심식사를 하고 공항에서 작별인사를 하는데 진짜 눈물이 날 뻔했다. 정말 좋은 운전기사 두 분과 친해지지 못한 게 가장 아쉬웠고 수쿤다 삼촌과도 정이 너무 많이 들어버려서 헤어지기가 정말 싫었다. 애써 쿨한 척 하면서 공항에 들어갔지만 계속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래서 정이라는 건 무섭나보다. 그렇게 다음에 꼭 만나기를 약속하며 역시나 딜레이 된 비행기로 쿤밍으로 날아갔다.

 

여행 열넷째 날,

드디어 마지막이다. 공항에서 밤을 꼴딱 새고 상하이행 비행기를 타려는데 재현이가 배가 너무 많이 아파서 공항 응급실까지 갔다가 비행기도 놓치게 되었다. 일단 중국공항직원들이 영어를 너무 지나치게 못한다는 게 정말 답답했다. 공항직원이라면 기본적으로 영어는 해야 되는거 아닌가? 그러곤 약을 먹고 조금 누워 있다가 일단 병원을 가더라도 한국병원을 가야겠다 싶어서 다음 비행기를 일단 타고 가는데 재현이가 다행히도 아까보단 많이 나아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제 시간에 맞춰진 비행기를 타서 김해에 무사히 도착하였고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이 났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학교를 통해 팀웍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함께 도와가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어떤 일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지금까지의 이 모든 여행이 나 혼자라면 절대 이겨낼 수 없는 상황이 많았던 것 같다. , 방글라데시에서 배를 타다가 강물이 완전 썩은 폐수가 되어있는 걸 보고 이 오염된 강을 깨끗하게 한번 정화시켜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그리고 우리가 빈민가 지역을 안 가서 그런지 정말 굶주리고 질병에 찌들은 기아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때까지 꿈꿔왔던 건 중에 제일 하고 싶은 게 의사고, 두 번째가 과학자였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 정말 많은 갈등을 하게 되었다. , 방글라데시의 오염된 물과 네팔 사람들이 물 한 방울 한 방울 아껴 쓰는 모습을 보면서 생활 속에서 물을 항상 아껴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여러모로 아쉬움도 많았고 실망했던 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현지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방글라데시, 네팔 문화도 많이 배우고 가는 좋은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