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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여행학교/제3기 세계로 여행학교

[제3기 세계로여행학교 기행문 ⑦]

한빛고1 이하언

 

 

-사전준비 & 방글라데시-

 

1. 기다림

여행학교를 출발하기 전부터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어마어마한 일들을 미리 예고라도 한다는 듯이 비행기가 지연되었다. 그 후로도 연이은 비행기 취소와 지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말 그대로 악순환이었다. 또한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내가 찾은 단어는 기다림이었다. 기다림이란 단어는 우리를 짜증나게 하고 긴장하게 만들었으며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그 작은 상황 속에서도 희열을 느끼고 즐거움을 찾았다. 어쩌면 이 상황이 모두 우리에게 기다림을 가르쳐주기 위함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무조건 빨리빨리. 느린 것이라면 답답해하고 참기 힘들어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기만 바란다. 그야말로 LTE시대가 오고야 만 것이다. 그런 빠른 세상 속에서 하늘도 쳐다볼 겨를 없이 바쁜 청소년들에게 닥친 이 상황들은 모두 여행학교에서 만큼은 기다림이 익숙하고 여유롭길 바라는 누군가의 바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2. 니하오마 

2외국어로 중국어를 들을 만큼 중국에 대한 어마어마한 기대를 안고 있었다. 이미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특히 우리가 이용한 동방항공이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상황들을 설명하자면 입 아플 정도로 많은데 그 중에서도 비행기가 취소된 사건과 은민이 가방을 잃어버린 사건이 가장 컸다. 사건들을 해결해 나갈 때 마다 어려웠던 점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점이었다. 공항이라면 당연히 공통 언어는 영어가 되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은 전혀 영어도 안 되고 우리를 대하는 태도도 무례했다. 이런 식으로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아질 줄은 몰랐다. 이걸로 느낀 건 우리도 똑같이 보일 수 있다는 점. 동방항공의 이미지가 중국의 이미지를 대표했듯이 우리의 행동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지인들에게 무례하게 대한다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 무례한 사람들이 될 수 있고 친절하게 대한다면 한국의 이미지도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외국에 나온 만큼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중국과 동방항공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3. 노력의 결과

방글라데시 선교사님은 방글라데시에 97년 처음으로 오셨다고 한다. 그 당시 방글라데시는 한국의 100년 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하셨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때만 해도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목숨 걸고 기독교를 전파했는데 지금은 반대로 번듯하게 성장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기독교가 박해받고 있고 어려운 처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그 시절 대한민국에 오셨던 선교사님들의 역할로서 방글라데시에 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분들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만큼 우리도 이 나라에 목숨 걸고 몸 바치는 만큼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세계로 여행학교가 하는 영상배달부

프로젝트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선교와는 관련이 없어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삶속으로 들어가기에는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선교사 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이 폭 넓은 기회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꼈다. 지역에 오래 머물렀던 선교사도 들어가기 힘든 현지인의 집에 우리는 영상편지라는 다리를 놓고 그들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우리나라가 이렇게 성장한 만큼 우리가 열심히 섬기는 데로 방글라데시가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4. 국제미아 될 뻔?

점심식사 후 아샬로이 학교로 돌아오는 길. 처음으로 방글라데시에서 릭샤를 타느라 들뜬 아이들이 두 명씩 릭샤에 탔다. 세계로 여행학교 아이들이 탄 릭샤가 줄줄이 복잡한 방글라데시 거리를 누볐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와 선규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는 상상도 못했다. 줄줄이 줄지어가는 중에 신호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질서 없는 도로상황 덕에 앞에 보고 따라가던 릭샤랑 떨어져서 재현이와 도연이가 타고 있던 릭샤랑은 붙었는데 나머지 앞 뒤 릭샤와는 떨어져 버렸다. 결국 학교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당연히 릭샤 아저씨가 가는 길을 알겠거니 편안한 마음으로 방글라데시의 경치를 구경하고 있을 때 당황해하는 아저씨를 보자 우리도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학교를 찾아 해매고 있는데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가니 어느새 빈민가로 들어가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지붕이라고는 나무막대기로 세워놓은 기둥 위에 편지를 올려놓고 따닥따닥 비좁게 들어선 집이라고도 말하기 힘든 집들이 모여 있었고 바닥은 말 그대로 바닥이었다. 축축한 땅에 얇은 천을 깔고 누워있었다. 길과 판자 집 사이로 흐르는 오염된 물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방글라데시의 바닥까지 본 것 같았다. 그 뒤로는 빈민가를 빠져나와 어찌어찌 기억을 잘 더듬어가며 학교를 찾아 돌아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선교사님과 먼저 도착한 애들에게는 긴장되는 시간이었고 정작 길을 잃어버렸던 우리들에게는 그저 일상 같은 시간이었다(왜 그런지는 앞전의 사건들이 이야기해줄 것이다). 오히려 나는 릭샤를 타고 길 잃어버린 것이 방글라데시의 바닥인 빈민가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지 아니었나 싶다. 사실 방글라데시뿐만 아니라 수많은 후진국의 사람들이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을 알지만 그때 봤을 때뿐이지 돌아서면 나 살기 바쁘고 그들의 삶은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정말 이번일이 나에게로 서는 뜻있는 일이었다. 다시 한 번 이들을 보고 생각할 거리가 주어졌다. 정말 현실적으로 내가 이들을 도우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자책이 됐다. 축축한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는 나는 아저씨가 끌어주는 릭샤에 앉아있다. 저 사람들을 보는 나의 눈빛이 가볍고 마음이 가벼웠다. 릭샤 끄는 아저씨는 분명 힘들어 보이지만 그들의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우리가 맘껏 이용해야한다는 가벼운 생각만 가지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뒤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마음이 불편하다.

 

5.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처음 방글라데시의 배 타러 가는 길에 도로는 포장되어 있어서 편한 편이었다. 요즘 차에 천연가스를 써서 매연은 많이 나오지 않는데 먼지가 정말 많이날렸다. 매연이 준 것은 다행이나 아무래도 비포장도로는 먼지가 엄청나게 많이 날려서 나뭇잎에 먼지가 가득 쌓여 나무가 제 역할을 전혀 할 수 없어 보였다. 뭔가 해결책이 필요 한 것 같아 보였다. 강물 또한 매우 더러웠다. 선교사님 말씀으로는 바닥에 돌이나 자갈이 없고 모래 밖에 없어서 정화가 안 되고 온갖 쓰레기들이랑 폐수들이 합쳐져서 물 색깔도 검고 더러웠다. 색깔만큼이나 더러운 냄새가 났다. 마치 물이 고여서 썩은 하수구냄새였다. 사람들이 배에 있던 쓰레기도 그냥 강으로 던져버리는 모습들이나 강에서 잔뜩 거품을 내 목욕하는

람들,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인식이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의 건강과 성숙한 인식을 위해서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정부에서는 강을 매립해서 생긴 땅을 

는 사업들을 하는데 모래를 육지로 옮기기에는 돈이 많이 들어서 배로 옮긴다고 한다. 배로 모래나 시멘트, 벽돌 등을 싣고 오면 옮기는 일은 다 인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머리에 소쿠리를 이고 줄줄이 늘어서서 모래를 옮기고 있는 모습은 그나마 방글라데시가 발전할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100년 전 모습이 저랬을까? 발전을 위해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이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함이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을 위해선 교육이 필요하고 질서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 부분인 것 같다. 앞으로 우리가 방글라데시의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에게 교육시킬 수 있을 만큼의 지식을 가지는 것이다.

 

6.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큰 ‘Bangladesh National Museum’을 견학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박물관이었다. 마침 박물관에서 근무하시는 모닐씨의 친척 니루박사님을 만나서 무료로 관람하고 자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방글라데시의 전통의류나 동식물, 생활방식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나 기억에 남았던 곳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전시관이었다. 방글라데시는 영국의 지배도 받았고 파키스탄의 지배도 받았었다. 파키스탄에 맞서 독립 투쟁한 사람들도 있었고 독립 투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본고본드씨도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학생들도 방글라데시 말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겨난 날이 모국어의 날(Mother's Day)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이런 아픈 역사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역사를 잊은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정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방글라데시도 하루 빨리 불법 없는, 부정 없는 선거를 치룰 수 있는 깨끗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7. 안녕들 하십니까  

우리가 밥 사먹은 곳은 우리나라에서야 그저 그런 정도의 수준이었고 값이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 길거리의 사람들은 엄두도 못내는 비싼 백화점이었다. 이 곳 사람들은 하루 종일 모래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일을 한다고 해도 사먹지 못하는 음식은 물론이거니와 하루 종일 일한다고 해도 하루 생계를 유지해 나가기도 힘들 정도의 삶을 살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친다면 말도 안 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다. 하루 일한 값이 한 끼 제대로 때우지도 못할 정도의 값이라니 말이다.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아무생각 없이 좋은 곳에서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입으면서도 불평할 수 있는 우리는 안녕하신지. 우리가 아무생각 없이 타는 릭샤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어떤 한 공간 안에서도 갑과 을이 나뉘고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이 나뉘어 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뒤에 편히 앉아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돈 있는 사람들과 두 다리에 온 힘을 쏟아 편히 앉지도 못 한 채 뒷사람을 끌고 가야하는 사람이 있다. 과연 우리는 뒷자리에 앉은 사람으로서 안녕하신가?

세계로 여행학교의 취지였던 공정여행은 사실 모순된 점이 많은 부분이 있었다. 완벽한 공정여행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 나라에 와서 환경오염에 보탬은 되지 말자는 취지에서 비누로 머리를 감고 최대한 오염을 덜 하는 노력들은 있었지만 어떻게 서든 샴푸를 쓰려는 모습은 공정여행이라는 사실을 몸에 익히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대로 받아드려야 할 부분이지만 아직도 우리 몸에는 윤택한 생활 방식이 자리 잡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사실 이런 부분에서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은 것도 잘못이다. 다 같이 고민하고 노력해 나가야할 부분이지만 그렇지 못했던 점이 너무 아쉬웠다. 말로는 다문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말로야 뭔들 못할까. 말로만 좋은 것 이야기하고 정작 실천으로는 옮기지 못하는 우리는 안녕할 수 없다.

 

 

-네팔-

 

1. 친절한 땅 네팔

네팔에 처음 발을 딛을 때부터 평화로움을 느꼈다. 네팔의 사람들은 친절했다. 입국심사를 할 때부터 다른곳과 다르게 느낌이 좋았다. 자동차, 릭샤, 오토바이들과 크락션 소리가 남무 하는 방글라데시에 있다오니 거리는 너무 조용하고 차분했다. 공항에서 나와서는 우리와 일주일간 함께 하실 수쿤다 삼촌을 만났다. 수쿤다 삼촌은 진주에서 일하였었고 일이 끝난 뒤 네팔에 와계시다고 말씀하셨다. 수쿤다 삼촌은 일주일동안 말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네팔에서 우리의 입이 되어주셨고 많은 도움이 되어주셨을 뿐더러 가정방문 영상편지 전달과 고아원방문 등 우리의 일정에 함께했다. 네팔이라고는 처음 와보는 나라인데다가 전혀 어떠한 정보도 없었던 우리들에게 현지인으로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겉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까지 볼 수 있게 해주셨다. 영상편지를 전하러간 집 사람들도 모두 친절하셨다. 우리를 손님으로 맞이해 주셨고 우리는 너무 감사했다. 집에 갈 때마다 음식을 대접 받을 수 있었다. 그릇이 비면 더 주는 게 방글라데시와 네팔의 문화인지라 배가 터질 만큼 먹어야했지만 다 우리를 손님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 무지 배불렀지만 너무 감사히 먹을 수 있었다. 이 곳 네팔은 자연뿐만 아니라 사람들 때문에라도 다시 가고 싶게 만드는 곳이었다.

 

2. 토끼 하늘 날다.

여행학교를 시작하기 전부터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기도한 패러글라이딩을 드디어 네팔에서 탈 수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도 가끔씩 하늘에 떠있는 패러글라이딩을 보면서 타보고 싶기도 했는데 이번 기회에 패러글라이딩을 탈 수 있다니 무지 기대됐다. 포카라에서 영상편지도 전달하고 드디어 패러글라이딩을 타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네팔은 특히 패러글라이더들에게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바람도 알맞게 잘 불 뿐더러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삼고 호수와 아름다운 산들과 함께하는 패러글라이딩의 기회는 흔치 않은 일이니까 말이다. 좀 더 높은 하늘을 날기 위해서 계속해서 차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패러글라이딩 출발점에 다다르니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멋있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감탄하고 감탄했다. 사실 날기 바로 전에는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가도 막상 패러글라이드를 타고 하늘 날자, 필요 없는 생각은 다 날아가고 눈에는 자연만이 들어왔다. 하늘에는 내가 날고 있고 저 땅에는 다 작게만 보였다. 바람이 느껴지고 비행기를 타는 것과는 다르게 새로웠다. 여기서 떨어져도 죽기밖에 더하겠냐는 생각으로 패러글라이딩을 즐길 수 있었다. 20~30분가량 하늘을 날다가 내려오니 좀 더 타고 싶다는 마음에 아쉬웠다. 다음에 혼자라도 와서 꼭 다시 타기로 마음먹었다.

 

3.어둠을 밝히는 

포카라 들어가기 전에 위치한 마을의 수니타씨 집에서 영상편지도 전하고 홈스테이도 하기로 되어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수니타씨의 어머니가 혼자 계셨다. 지금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나중에 전기가 들어오면 영상편지를 전하자는 말에 우리는 남는 시간동안 마을도 둘러보고 마을의 아이들도 만나보기 위해 여기저기 흩어졌다. 마을에 있는 학교에 가보니 마침 시험기간이라 평소보다 늦게 마친다고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의 시험에 방해되지 않도록 학교를 나와 주어야 했고 마침 우리 또래 같아 보이는 여자아이 두 명을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마을을 구경시켜 준다고 해서 구경도 했다.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어두워져서 돌아가야 했다. 수니타씨의 부탁으로 어머니께 김치찌개를 대접해야 했는데 전기가 안 들어 와서 촛불에 의지해서 요리를 해야 했다. 그렇게 네팔은 도시나 시골이나 늘 전기가 들어오는 시간도 일정하지 않고 전기 없이 생활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센터장님이 생각해 낸 것이 수니타씨의 어머니를 위해 집에 솔라패널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제일 작은 솔라패널을 설치하더라도 전구 네 개정도를 킬 수 있는 전기가 생산된다고 했다. 원래 하루만 예정 돼 있던 홈스테이가 하루 더 늘어났고 깜깜하게 지내야 했던 첫째 날에 비해 솔라패널이 설치된 두 번째 날은 밝게 지낼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전기가 끊길 일 없이 잘 살지만 네팔은 전기가 안 끊기면 이상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돈이 조금만 더 있다면 솔라패널이라도 설치해 놓는다면 그나마 밝게 지낼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집이 대부분인 것이 안타까웠다.

 

4. 감사 합니다.

여행학교 중에 회계를 맡았었다. 돈을 계산하다보니 그 나라의 사정을 알게 되고 또 하나 우리나라가 매우 잘 살고 있는 것이라는 걸 느꼈다.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알기 힘든 것이 현실인데 우리는 늘 넘치게 살고 있었다. 네팔의 선교사님이 운영하시는 고아원에 방문을 했다. 아이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는 수는 적었다. 이 고아원은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와 키우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아이들을 처음 봤을 때는 우리를 많이 낯설어 하는 모습이었는데 털모자도 씌워주고 풍선불고 놀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무지 활발하고 너무 귀여웠다. 아이들은 네팔어와 영어, 한국말도 잘 했다. 선교사님의 사랑 넘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너무 넘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가정에서 매일 배불리 먹으면서 원하는 것 다 가지고 살지만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불만을 가지기 십상이다. 이래서는 안 될 것 같다. 있는 것에 만족하며 감사로 살아야 겠다.

 

5. 안녕들 하셨습니. 

처음부터 많은 사건들이 잘 해결될 수 있었고 프로젝트가 진행 될 수 있었던 것은 팀의 리더로서 이끌어주신 센터장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행학교를 함께 한 아이들이 열심히 발로 뛰어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늘 한국에서 응원해주시고 기도해주신 부모님들이 있었기에 한국오기까지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었고 힘내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6. 마지막 한마디

세계로 여행학교를 마친 뒤 나를 돌아봐야 했다. 사실 내가 잘못한 부분에 있어서는 반성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나는 여행학교의 취지였던 공정여행에서 모순된 부분이 많은 생활을 했던 것 같다. 다른 나라에 가서 환경오염에 보탬은 되지 말자는 취지에서 비누로 머리를 감고 최대한 오염을 덜 하는 노력들은 있었지만 샴푸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공정여행이라는 사실을 몸에 익히지 못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대로 받아드려야 할 부분 이지만 아직도 우리 몸에는 윤택한 생활 방식이 자리

잡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심각하게 고민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도 내 잘못이었다. 말과 생각으로는 다문화를 이해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나의 잘못 된 부분이었다. 그리고 여행학교는 우리였기 때문에 항상 무슨 일을 하든지 전체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짧은 생각과 판단이 큰 결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나이기에 내 잘못에 의해 피해를 본 모든 사람들에게 죄송하고 반성한다. 앞으로는 좀 더 깊이 있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