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로 여행학교/제3기 세계로 여행학교

[제3기 세계로여행학교 기행문 ②]

경해여중1 문호정

 

 

-사전교육-

 

 

나의 부모님 없는 첫 여행이자 등 따시고 배부른 여행과는 거리가 먼 첫 여행은 시작부터 스펙타클 했다.

 

 

 

 

 

-방글라데시-

첫날의 김해에서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는 1시간가량 연기됐었다. 덕분에 645분경 탑승하여 현지 시각 8시에 상하이에 도착해서 쿤밍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지만 2시간동안 움직이지 않는 비행기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던 우리 팀에게는 비행기 이륙시의 그 소리가 아니라 항공평 취소를 알리는 방송이 들려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일행 중 한 명의 짐이 실종된 것이다. 어찌어찌 짐을 되찾아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호텔에서 준 아침식사는 그야말로 토나왔다). 아침 8시경 비행기에 탑승해 쿤밍으로 갔다. 쿤밍에서도 이런 일은 계속되었다. 다카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항공사 측에서 귀찮았는지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 우리와 같은 처지의 방글라데시 인들이 항의에 힘을 보태어 우격다짐 식으로 다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인 다카의 아샬로이 학교에 착해 피곤한 몸을 차가운 타일 위(의 침낭 위)에 뉘였다.

 

아침 815분경. 밤새 추위와 혈투를 벌이던 우리는 꾸물꾸물 기상했다. 전투식량과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고 배드민턴을 치러 (또는 구경하러) 뒷마당으로 내려갔다. 놀다 보니 어느덧 소화가 되어 12시 반에 현지 식당인 ‘spice&herb’

에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스프는 향신료의 향이 너무 강해 감히(...) 먹을 수 없었지만 볶음밥과 치킨은 의외로 입에 맞았다. 식사 후 학교로 돌아오기 위해 릭샤에 탑승했다. 21조로 4조 총 9(선교사님의 10살 난 아들까지)이었는데 돌아온 건 어째 2개의 조 뿐이었다. 그런데 오자마자 별의별 일들을 다 겪어서인지 일행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이때까지 터진 사건들이 어찌어찌 다 잘 해결된 것처럼 곧 해결되겠지 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230분경 실종되었던 네 사람은 245분에 사지 멀쩡히 릭샤를 타고 돌아왔다.

 

처음에 항공편이 연기되고 취소되고 짐이 사라졌을 땐 (이 모든 일은 하루 만에 다 일어났다) 굉장히 얼떨떨했었다.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구나싶어 신기했고, 마치 내 일이 아닌 남 일을 보는 것 같이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금세 익숙해 진건지 이젠 웬만한 일에는 놀라거나 당황하게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앞으로는 좀 무난한 여행이 되었으면 한다.

 

방글라데시에 온지 사흘째 되는 날, 원래의 계획이었으나 취소되었던 영상편지 전달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방문할 가정은 아만 씨의 댁이었다. 1시간이 조금 넘게 차를 타고 중앙선도 없는 혼잡한 거리를 달려 도착한 곳은 예상 외로 아파트였다. 아만 씨의 가족은 성대한 식사를 차려 놓고 우리 팀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상편지 담당이 영상편지를 전하고 촬영하는 동안 나를 포함한 그 외의 인원들은 멍하니 방에서 기다렸다. 기다림 끝에 촬영이 끝나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는 야채밥, 소갈비찜, 과일 등을 실컷 먹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현지 어린이들과 놀다가 기념촬영을 하고 돌아왔다. 꽉 찬 뱃속에 현지 분식인 쇼모짜싱가라까지 밀어 넣고 나니 살이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쪄 갈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다음날은 일일 크루즈 여행을 떠나러 아침 9시경 학교를 나섰다. 열 몇 명이 다 탈 만큼 큼지막한 카누(?)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갔다. 목적지는 옛 왕궁을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박물관이었다. 부레옥잠과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는 시커먼 강은 방글라데시의 수질 오염이 심각함을 몸소 보여주었다. 배에서 내릴 때쯤엔 요란한 모터의 굉음으로 귀가 다 먹먹해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고막의 희생은 무의미했다. 이슬람 국가인 이곳은 금요일이 휴일이라 박물관이고 뭐고 다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 전투식량으로 점심을 때우고(나는 어제의 과식의 영향으로 먹지 않았다) 오는 내내 귀를 틀어막고 왔다. 저녁은 선교사님 가족과 다 함께 식당에서 치킨, 카레에 절인 생선, 향신료가 들어간 밥 등을 먹었다. 서민들은 올 수조차 없을 만큼 비싼 식당이라고 했다.

 

그 다음날, 우리 팀은 국립박물관에 갔다, 생각보다 큰 규모에 비해 유물의 보존이 잘 안 되어 있었다. 박물관에서는 방글라데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배웠고 그를 통해 현재의 정치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박물관 관람 이후 백화점에 가서 점심을 사 먹었다. 햄버거를 먹고 선교사님의 10살 난 아들인 태희가 남긴 감자튀김과 치킨 튀김옷까지 먹고 나니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 생각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지만 조금은 옅어졌다. 어쨌든 아이스크림을 먹긴 먹었다. 이것이 어제의 일이다. 오늘은 일요일로, 선거 당일이다.

바깥은 지금 폭풍 전야처럼 조용하고, 나갔다 온 사람들의 말로는 경찰이 쫙 깔려 있다고 한다. 덕분에 일정은 전부 취소되었다. 그 대신 모닐 씨가 오셔서 자신의 인생사를 이야기해주셨다. 어제 갔던 박물관에서 배운 방글라데시의 역사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그것이 개인이 겪은 일이라고 하니 더욱 와 닿았다. 통역은 어쩌다 보니 내가 하게 되었는데 덕분에 그 감동적인 이야기가 내가 통역함으로써 그 감동과 스펙타클함이 옅어지고 말았다. 영어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쨌든 내일이면 네팔에 가게 될 텐데 이때까지의 일로 보아 그곳에서도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다.

 

 

-네팔-

방글라데시에서 네팔로 가는 길이 나에게 홀리 로드(holy road)가 아니었던 것은 확실했다. 공항 안내를 얼떨결에 맡게 된 것부터 기우였다. 입국카드작성도, 비자 발급도 언제나 부모님 또는 여행사 측에서 알아서 처리해 주었고, 공항의 면세점에서 비행기 출발 시각 전까지 면세점에서 쇼핑을 하다 시간 되면 가는, 그런 것에만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공항 안내는 상당한 부담을 안겨 주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네팔에 도착한 첫날부터 살살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틈만 나면 계속 퍼 잤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 내가 왜 여기 있지 싶었다. 시간 상 으로는 네팔에 온 지 삼일 째 오후, 공간 상 으로는 수니타 씨의 집이었다. 잃어버린 나의 이틀은 어디로 갔는가에 대하여 고민해 볼 여유도 없이 급작스런 복통에 화장실로 뛰어 갔다 왔는데 한 여성이 무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너마스떼.” 할 일도 없겠다, 한 번 인사를 건네 보았다. “너마스떼.” 그녀의 굳은 표정이 확 풀리면서 밝은 목소리로 답변이 돌아왔다. 이름은 모네카(Moh Neeca)였고, 생각 외로 나와 동갑이었다. 모네카와 이런저런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영어 공부를 이 정도나마 해 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네카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척 꺼내더니 페이스북 아이디를 묻는 것은 나에게 소정의 문화 충격을 안겨 주었다. 모네카는 시집 간 언니가 한 명 있다고 했다. 내가 내 남동생 뒷담을 하자 그 애는 만날 싸우더라도 동생이 있는 친구들이 정말 부럽다고 했다. 그 말에 한번 찬찬히 생각을 해 보니 동생이 있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메뉴는 시은 오빠가 만든 김치찌개였다. 오랜만에 본 한국적인 음식에 정신줄을 놓고 흡입했다. 저녁 식사 이후 목사님께서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호텔에 가는 대신 수니타 씨의 집에서 하루 더 홈스테이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나도 몸은 안 좋지만 아플 사람은 어차피 어딜 가나 아픈 건 마찬가지일 테니 호텔보단 이곳에 좀 더 머무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모두 같은 생각이었던 건지 반대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영상편지 전달 후에(아니, 전이었나?) 모두가 기대했던 패러글라이딩을 타러 갔다. 막상 코앞에 닥치자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패러글라이딩을 취소한 나는 내 변덕을

컨디션 저하라는 명분으로 정당화시켰다. 나와 은민 언니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대신 기념품을 사고 하늘 위에 떠다니는 패러글라이더들의 발밑에 있는 폐와 호수에서 경치를 감상하고 호수 가운데의 작은 섬에 있는 사원을 구경했다. 노를 저어 나아가는 자그마한 배는 느림의 미학을 가르쳐 주었다. 뱃놀이 후 입이 심심해서 일행의 가이드를 해 주신 삼촌에게 과일을 사 달라고 했다. 모르긴 몰라도 삼촌은 우리 때문에 지갑이 좀 얇아지셨을 것이다.

 

다시 수니타 씨의 집으로 돌아와서는 동네 사람들과 캠프파이어를 했다. 모네카는 나에게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면서 우리 일행에 대해서도 물어보길래 아는 대로 소개해 줬다. 이후 이틀 경 네팔에서 남은 영상 편지도 전하고 빈둥거리기도 하고 관광과 쇼핑도 했다. 그 중 차를 타고 이동하던 도중 잠시 멈춰서 구름다리를 건너 계곡을 구경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구름 다리 위에서 본 강물이 마치 녹옥같은 색으로 빛났다. 내려가서 가까이 다가가 본 강물은 강가 바위에 부딛혀 하얗게 부서지며 굽이치는 모습이 히말라야 산맥을 연상케 했다. 강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 얼음처럼 차갑다기보단 몸을 관통하는 시원함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항 속의 거북이들을 위해 돌 몇 개 주워올걸 하게 된다.

 

여기가 네팔인가 방글라데시인가 한국인가 슬슬 헷갈리기 시작할 무렵, 우리 일행은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향했다. 처음 방글라데시에서 는 사실이 와 닿지 않았던 것처럼 간다는 사실이 와 닿지 않았다. 현재 나에게 달라진 것을 꼽으라면 첫째, 네팔 친구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 수도꼭지에서 온수가 나오는 것이 정말 감사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만약 다음에 또 어딘가를 가게 된다면 이 외에도 뭔가 달라진 게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