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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언론보도자료

(매거진 피플파워) “형님, 아저씨, 사장님…다 나를 부르는 것”

 

 

사천다문화통합지원센터는 지난 8월 결혼이주여성들의 학력 검정고시 ‘명문 기관’으로 급부상하면서 화제가 됐다. 경남도 교육청에 따르면 경남지역 고졸 검정고시 합격률이 60%대인데 사천다문화통합지원센터는 매번 100% 합격률이다.

 

또 그 이전에 필리핀 현지에서 사천지역 내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글로벌 인재로 육성하기 위한 ‘2012년도 다문화자녀 희망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끌어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사천다문화센터에서 지난 2005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사랑의 배달부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됐다. ‘사랑의 배달부 프로젝트’란 결혼이주여성의 해외 현지 가정을 방문해 영상편지와 선물을 전달하는 일로 5가정을 방문해 영상편지와 가족의 선물을 전달했다.

 

사천다문화통합지원센터의 이런 활발한 사업에는 ‘일 잘하는 목사’ ‘열혈 목사’ 로 불리는 이정기 센터장이 있었다.

 


목수의 아들이었고 나도 목수였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이정기 센터장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세상 근심 하나도 없는 얼굴에 편안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는 예상 밖이었다.

 

 이정기 센터장과 부인 변한얼 씨 / 권영란 기자

 

“26살에 대학에 입학했어요. 입학 전까진 목수 일을 했지요. 목수의 아들이었고, 목수 자격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2때 어머니 돌아가시고, 새 어머니가 들어오셨는데 밥 한 그릇 먹기 위해 눈치를 많이 봐야 했지요. 고3때는 전신마비 걸리면서 대학가는게 좌절되고, 몸은 조금씩 회복됐지만 후유증으로 4년 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장 대학가는 건 어렵겠고 군대문제를 먼저 해결하려 했는데, 마침 병력이 있어 단기사병으로 사천 공군부대에 입대를 했는데 보직이 당구장 관리여서 부대원이 없었어요. 입대할 때도 혼자, 제대할 때도 혼자였지요. 다행히 군대에서 체력이 회복됐고 제대하면서 기술을 가지는 게 좋겠다 여겨 건축목공기능사 자격증 따고, 건축회사에 입사했었지요.”

그는 대학 대신 ‘망치 하나 들고’ 건축판을 다녔다. 그때 부인 변한얼 씨를 만났다고. 활달한 이 센터장과는 달리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변 씨는 큰 목소리 없이 가만히 웃으며 귀 기울여 듣는 시간이 더 많았다.

“91년 최일도 목사가 서울에서 ‘밥퍼 운동’을 한다고 해서 봉사하기 위해 기독모임 청년들이 진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거기 여러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었어요. 당시 저는 도시공학과 전공 대학 3학년생이었고 이 센터장은 건설회사에서 목수일을 하고 있었지요.”

 

                                                       이정기 센터장과 부인 변한얼 씨 / 권영란 기자

 
한얼 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에게 어떤 점 때문에 결혼했느냐 물었다.

 

“대학 마치고 좋은 직장에 대리직으로 있었는데, 저는 무엇보다 삶의 가치관과 신앙을 지켜나가고 싶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이 사람은 하나님 배반할 사람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멋있다는 생각도 했고요.(웃음)”

 

이 센터장은 결혼하고 나서 서울로 곧장 갔다. 신학대에서 지역학으로 인도네시아를 전공했다. 그에겐 서울에서 산다는 건, 애 낳고 가정을 지켜나간다는 건 경제적으로 참 쪼들리는 일이었다. 주말마다 목수일이지만 일용직 일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는 목사의 꿈보다 제3세계에 나가서 선교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한테 주어진 기능을 더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서른이 될 때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싱크대공장 일 하고 가구 만들고, CF스튜디오, 영화촬영장 등 세트제작 일도 했지요. 참 많은 일을 했고 배웠습니다. 그런 경험이 이 센터를 할 수 있는 힘이 된 것 같아요. 지금도 우리 센터 일은 제가 모두 직접 하거든요. 돈 안 드는 방향으로.(웃음)”

 

2000년 11월 쯤 그는 서울에서 산청 민들레공동체마을로 내려왔고 이듬해 다시 진주 미천면에서 빈집을 얻어 살면서 헤비타트 간사 일을 했다.

 

 

하나님이 써주신 사업계획서 그대로

결정적으로 신학을 해야 겠다는 생각한 건 그때 일어난 사건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선교사로 가려고 했는데, 집사람한테 사고가 생겼어요. 아내가 운전하던 오토바이가 중앙선을 넘어 트럭과 부딪혔는데, 그때 집사람은 막내를 임신 중이었거든요. 머리가 터져 피가 철철 흐르는데, "하나님! 살려주세요. 시키는 일 뭐든지 하겠습니다" 고 정신없이 기도했어요. 얼떨결에 하나님과 약속한 거지요. 나중에 보니 상처는 마취하지 않고도 치료할 정도로 약했어요. 하나님한테 낚인 기분….(웃음)

 

그는 다시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갔다. 일반 목회를 마음먹고 시작한 공부였다.

 

“대학원 1학년 2학기 개강식 때 정신없이 뭔가를, 그것도 일주일 동안이나 썼는데, 그게 나중에 보니 사업계획서였어요. 이주노동자에 관한 것들이었는데, 저는 그때까지 잘 알지 못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일주일에 걸쳐 아주 방대한 계획을 썼던 거지요. 지도교수에게 보였더니 저보고 ‘하라’대요. 8년이 지났지만 그때 그 계획서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았어요. 지금 하고 있는 게 모두 그 계획서대로 입니다. 외국인 이주민을 지원하는것과 청년 인적자원을 활용해서 다문화시대의 해법을 찾아가는 것….”

 

다시 사천시로 내려온 그는 사천 사남공단에 무조건 들어갔다.

 

“마침 인도네시아 친구들이 있어 인니 말로 인사를 하니 굉장히 반겨주더라고요. 힘을 얻어 공장을 계속 돌아다녔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일을 하기전엔 다들 센터 사무실을 얻고 이사회도 구성하며 예산도 마련해서 개원식하고 그러는데 저는 그냥 이주노동자들 기숙사에 먼저 들어갔어요. 그곳이 센터였지요. 오늘은 이 공장, 내일은 저 공장 그렇게 매일 돌아다녔습니다. 선교 목적으로 가지도 않았어요. 그냥 사람이 좋아, 그 사람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것 같아 찾아갔던 거지요.”

 

                   이정기 센터장과 부인 변한얼 씨 / 권영란 기자

 

 

이 센터장이 공단 이주노동자를 찾아 나설 때 부인 한얼 씨도 이제 6개월이 된 셋째 아이를 등에 업고 나섰다. 그렇게 두 사람은 4개월을 보냈다.

 

리고 2004년 12월 개원예배를 가졌다. 지역 목회자들을 운영위원으로 모시면서 조직은 만들었지만 여전히 사무실은 없었다. 우연히 사천기독교연합 소속 찬양팀과 연결이 되면서 회장으로 있던분의 사무실에서 책상 하나 놓고 지낼 공간을 확보하게 된게 센터의 시작이었다. 

 

“2006년 7월 지금 센터 사무실인 이곳으로 왔습니다. 처음 왔을때 지하 공간은 엉망이었지요. 근데 제가 직업이 목수지 않습니까. 충분히 고쳐서 써겠더라고요. 이주노동자들하고는 형 동생 지간으로 살게 됐지요. 아저씨, 형님, 사장님, 센터장님…다 저를 부르는 소리예요. 호칭이 너무 많지요. 그렇지만 저를 믿고 따른다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이 센터장은 센터 사무실을 연 후 주말이면 찾아오는 6~70명의 이주노동자 밥을 해먹였다. 자신은 사천 외곽에 있는 빈집에 살고 학원비가 없어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못하면서 ‘남들이 들으면 믿지 못할 짓’을 수 년 동안 해왔다.

 

“어차피 하나를 포기해야 이 삶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은 꼭 해 먹이고 싶었거든요. 제가 형이니까, 형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어요. 저도 노동자였으니까 누구보다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요. 그래도 밥 해먹이는 건 참 힘들었습니다. 비용과 노동이 많이 들어갔어요. 돈 적게 들이고 효과적인 '저비용 고효율'의 센터 운영만을 생각하다보니 늘 쪼들리는 삶이었습니다. 

 

 

정부보조 집행방식 다문화정책은 바뀌어야

지막으로 다문화정책에 대한 이 센터장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그는 명쾌했고 확고했다.

 

“정부주도형 정책은 잘못됐다고 봐요. 모든게 예산과 관련돼 정치인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습니다. 저는 예산이 확 줄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정말 이주민들을 위해 일할 사람들만 남아서 일을 하게 될테고, 그때에야 뭔가 제대로 될 것 같아요. 관주도 행사는 참여인원 동원이 문제인데 어떤 곳에서는 각 나라의 이주노동자 리더와 딜을 하더라니까요. ‘얼마 줄 테니 너그 이리 와라’ 이런 거죠. 다문화정책이란 게 이벤트 사업에 젖어들고 있습니다. 시기마다 현장에 맞게 순발력 있게 대응하려면 정부보조 집행방식을 바꿔야 해요. 담당자에게 돈 달라고 졸라대지만 말고 재능기부자를 찾아, 강사로 초빙하고 같이 활동할 수 있게 하면 됩니다.”

 

이 센터장은 센터를 둘러보며 사천에선 다문화센터의 규모가 이 정도면 적당하다고 했다. 그는 더 커지면 과잉, 역효과가 생길 것이라 했다.

 

“앞으로 이주노동자 창업시키는 작업을 계속 할 겁니다.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환영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자신이 갈 집이 있고 그곳에서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가장 큰 선물이거든요. 지난 번에 한 ‘세계로여행학교’도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다문화 인식개선 프로그램인데, 한국 아이들에게 우리의 이웃으로 이들을 맞아주자는 생각을 심어주는 거죠. 아이가 달라지니 그 가족 전체가 다문화인식이 달라지더라고요. 그동안 해온 프로그램을 가지고 다문화 연수와 교육 프로그램으로 짤 계획입니다.”

 

 

                                                         사천다문화통합지원센터 활동 포스터

 

이정기 센터장은 마지막으로 사천다문화통합지원센터가 다문화시대를 맞이한 한국사회에서 롤모델이 되고프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보여주는 다문화정책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의 해법을 제시하고 싶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가 왜 이 일에 집중하는지, 왜 그리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