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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여행학교/제1기 세계로 여행학교

[제1기 세계로여행학교 기행문②]

박성호 (사천중 3)


 

 
인도네시아 (Indonesia)

15일 센터에서 환송식을 마치고 저녁 오후 12시 인천공항으로 출발하기 위해 승합차에 탑승하였다. 16일 월요일 5시쯤 도착하여 옷을 화장실에서 다 갈아입고 하현정 선생님께 겉옷을 반납하고 짧은 반팔티로 갈아입었다. 6시쯤 공항 음식점을 돌다가 버거킹이라는 햄버거 전문점에 도착하여 배를 채웠지만, 음식 맛은 없었다. 비행기를 탈 생각에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10시 15분에 홍콩행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기내식으로 나오는 돼지볶음밥을 먹었다. 그리고 홍콩에 도착해서 면세점을 1시간 정도 구경을 하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행 비행기를 탔다.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했다. 그래서 짐을 부치고 비자를 샀다.

아무튼 힘들게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도착해서 운전기사를 찾는 도중 택시 기사들이 우리 팔을 잡았다. 나는 단호하게 ‘NO'를 외쳤다. 그리고 운전기사를 찾고 숙소로 갔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는 모텔 비슷했는데 ’찌짝‘이라는 도마뱀을 처음 보았다. 귀여웠다. 그러다가 곤충과 벌레에 호기심이 많은 형도와 급격히 친해지게 되어 우리는 ’사고패밀리‘를 결성하였다. 그렇게 인도네시아에서의 첫 날이 지나가고 아침 8시부터 영상편지를 전달할 방문 가정에 대해 회의를 나누었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스마랑을 거쳐 발리까지 운전해 줄 기사님도 소개를 하였다. 운전기사의 이름은 ’옹고‘이다.

인도네시아의 첫 번째로 데디씨 집을 방문하였다. 데디의 가족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영상편지를 보여주고 첫 인도네시아 음식을 먹었는데 맛이 있었다. 나는 주로 치킨 위주로 먹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풍선도 주고 사탕도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숙소로 돌아가기 전 데디의 어머니께서 ‘바틱‘이라는 인도네시아 전통 부채를 선물로 주었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차를 타고 달려 두 번째로 하리만씨의 집에 도착했는데 상당히 분위기가 진지해 보였다. 그래서 영상편지를 보여주고 점심을 얻어먹었다. 여느 때와 같이 선물과 함께 과자, 과일을 한아름 주셨다. 정말 인정이 넘치신다.


 
그리고 차를 타고 밤을 달려 새벽 1시경 야니씨 집에 도착하여 인사도 없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야니씨와 인사하고 아침을 얻어 먹었다. 야니씨는 한국에서 일할 당시 사천다문화통합지원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워 인도네시아로 와서 한국어학원을 차렸다. 학원의 이름은 ‘무궁화학원’이다. 그리고 이름을 다시 ‘진주학원’으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진주에서 일을 했고, 보석인 진주의 가치가 높아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진주학원 학생들에게 자기소개를 하고 진주학원 학생들과 친해졌다. 

그 학생들은 한국으로 가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고, 학원에서 시험을 치고 있었다. 그 학생들의 시험이 끝난 후 1시쯤에 풋살구장에서 축구 시합을 하였다. 정말 재미있었다. 점심은 풋살구장 뒤 식당에서 다 먹고 후식으로 옥수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 옥수수로 메기밥을 주었다. 근데 인도네시아 학생 중 한명이 나에게 옥수수는 인도네시아말로 ‘자궁‘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도 옥수수를 한국어로 설명해주니까 그저 서로 웃었다.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아도 개그코드가 비슷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수영장으로 이동하여, 어린이 풀장에서 놀았다. 근데 인도네시아 어린 친구들이 시비를 걸어 우리도 똑같이 욕을 했지만, 나중엔 화해하고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더 큰 풀장으로 가서 이쁜 친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다음에 야니씨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근데 샴푸 없이 비누로 머리를 감으니 머리카락이 뻣뻣한 느낌이 들었다. 목욕도 제대로 못하고 모기가 너무 많았다. 화장실에서는 휴지 없이 손으로 뒤처리도 하고 빨래도 했다. 그리고 찌짝도 잡았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처음 손으로도 밥을 먹었다.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아이들과 놀면서 페트병에 소변을 했다. 다음날 발리로 가는 배에 탔는데 ‘몬개‘라는 동전을 던지면 뛰는 사람에게 돈도 던지고 인도네시아 음식 볶음밥인 ’나시고랭‘을 먹었다, 그리고 발리 호텔에 도착하여 진짜 좋은 숙소에서 방도 썼고 그 다음날 아침부터 수영도 하고 울루와뚜 사원으로 가서 원숭이에게 땅콩도 주고 해변이 정말 장관이었다. 그리고 쇼핑몰에 가서 시계도 사고 샌달도 사고 셔츠도 하나 샀다. 그리고 맛있는 꼬치와 밥을 먹고 호텔에 와서 샤워를 하고 인도네시아를 떠나기 전 날에 운전기사 옹고씨에게 친구들과 함께 모은 돈으로 팁을 주었다. 옹고씨는 정말 미소 천사이고 착하다. 최고의 운전기사인 것 같다. 아, 그리고 브로모 화산까지는 지프차를 타고 갔다. 중턱 쯤에는 말을 타고 걸어서 계단을 올라가는데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캄보디아 (Cambodia)

나는 23일 새벽 나시 옹고 아저씨의 차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잠이 몹시 왔지만, 프놈펜으로 가기까지가 진짜 흥미진지했기에 잠 오는 건 잠시 인도네시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말레이시아 공항에 도착했는데 날이 몹시 더웠다. 아침밥으로는 맥도날드에서 햄버거와 콜라를 먹었는데 맛이 썩 그리 좋지 못하였다. 그리고 남은 비행기 시간동안 쇼핑을 하려 했지만, 살 만한 물건이 없었기에 아이들을 모아 가위, 바위, 보를 하여 공항 가운데에서 춤추기를 했다. 첫 번째 술래는 내 친구 태헌이가 말레이시아를 외치며 원을 그리는 건데 정말 우스꽝스러웠다. 말레이시아 경찰과 승무원들도 웃었다. 

그리고 두 번째 술래는 까불이 형도였는데 정말 웃겼다. 근데 갑자기 저 멀리서 백인 할아버지가 큰소리로 웃으며 형도에게 10달러를 줬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가 운영하는 에어아시아를 타고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갔다. 기내식이 안 나와서 나랑 형도는 사서 먹었다. 치킨밥을 먹었는데 정말 느끼하고 맛이 없었다. 캄보디아에 도착해서 비자를 쓰고 20달러를 지불했다. 희한한 것은 시차이다. 인도네시아와 쿠알라룸푸르의 시차가 있는데 신기하다. 캄보디아의 건축양식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 입구가 좁고 집이 길다. 캄보디아에서 맛있는 음식은 사탕수수인데, 달달한 맛이 꿀맛이다. 그리고 바게트 빵이다. 아침에 먹는 게 특징인데 갓 구운 빵이 겉은 딱딱하지만, 고소함과 안에 부드러운 그 속이 일품이다.


우리가 첫날 방문한 집은 김다라씨의 집이다. 집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영상편지를 전달하려는 그 뿌듯함이 나의 몸을 움직였다. 정글 비슷한 곳이었다. 그곳은 석탄? 절벽 등이 있었는데, 어느 아이들이 돌을 깨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아이들의 팔과 다리는 상처와 딱지가 있었다. 가난과 배고픔이 아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었다. 아이들의 그 순진한 눈망울이 불쌍해 보였다. 캄보디아가 더욱 발전해서 교육의 길을 이끌어 주면 좋겠다. 그리고 김다라 씨 집에는 돼지와 칠면조, 닭 들을 키우고 있다. 우리들은 다라씨 가족에게 영상편지를 보여주였다. 우리는 그 영상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에게 풍선과 사탕을 나눠주며 시간을 보내고 마무리를 지었다. 뿌듯하고 뜻 깊은 시간이었다.

 
두 번째로 달려간 집은 속체이씨 집이었다. 속체이씨는 한국에 와서 일을 하여 번 돈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집을 사주셨는데, 정말 대단하였다. 속체이씨 아버지는 지뢰를 밟아 오른쪽 무릎까지 잃어 수족을 하고 계셨다. 이정기 센터장님 말씀으로는 캄보디아 지역에는 어른들이 심어놓은 지뢰에 팔과 다리를 잃은 아이들이 많다고 하였다. 그 집에서도 맛있는 사탕수수를 주셨다. 그리고 또 한참을 달려 욱칠씨 집에 도착하였다. 욱칠씨는 얼굴이 잘 생겼다. 내가 촬영을 하여서 더욱 뿌듯했다. 거기서도 말도 보고 병아리도 보고 아이들에게 학용품을 선물했다. 그리고 저녁은 이삭학교라는 김기대 선교사님이 교장이신 캄보디아의 지도자급을 배출하는 기관인데 우리에게 바베큐 삼겹살을 저녁 만찬으로 줬다. 정말 꿀맛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캄보디아에서의 두 번째 아침은 바게트 빵으로 해결하고 또 한참을 달려 로반나씨의 집으로 갔다. 돼지를 키우고 계셨다. 나는 새끼 돼지를 사냥을 하였다.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대학까지 나오셨지만 돈 버는 수입이 적어 한국에서 일을 한다고 하였다. 근데 사천에서 일을 하는데 욕도 많이 듣고 슬리퍼로 뺨까지 맞았다고 하셨다. 정말 안타까웠다. 그리고 두 번째 집은 한 5시간을 달려 고무나무 농장이 있는 마을로 들어갔다. 정말 대단했다. 그 집은 팔라넷이라는 결혼이주여성이었다. 그 집도 우리에게 맛있는 만찬을 대접해주었다. 3번째 집은 결혼이주여성의 에압 스레이몸이었는데 밤이 돼서야 도착했다. 거기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가지고 있는 볼펜과 풍선이 모두 동이 났다. 재미있었고 뿌듯했다.

그날 저녁이 설날이라고 센터장님이 5달러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고 다음날 박미영씨 집으로 가서 야자, 코코넛을 먹고 영상편지 촬영을 하고 재미있었다. 두 번째 집은 손뿐록이었다. 그 집에는 고양이가 있는데 새끼를 낳아서 매우 민감했다. 그 집에서 밥도 먹고 아이들에게 마지막 선물까지 모두 주었고 기념촬영을 마치고 씨엠립이라는 곳을 향해 가서 저녁으로 한국식당에서 갈비와 김치찌개를 먹고 찌짝도 잡았다. 구걸하는 사람도 있고 북한 대사관도 있었다. 내일은 축구도 하고 킬링필드라는 캄보디아의 아픈 역사를 체험하러 갈 것이다. 이 여행을 통해 많은 배움을 얻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사람을 사랑한다는것과, 틀리다가 아니고 다르다라는 것이었다. 다음이라도 배낭하나 메고 여행을 올 생각이다.



세계로 여행학교를 마치며...

앙코르와트는 세계 7개 불가사이라 불리는 한 때 아시아를 손아귀를 쥐고 호령했던 대국이었다. 여러 사원이 있지만 그 중 3개의 사원만 다녀왔다. 엄청난 돌 벽화와 정글 속에 묻혀있다. 한 고고학자에게 발견된 사원 등 우리가 보고 배운 것은 엄청난 유산과 보물이다. 일단 벽화의 주제는 전쟁이다. 나는 가이드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충 여자 때문에 싸운 듯(?)하다. 그리고 뚜올 슬랭은 캄보디아의 아픈 역사가 베어 있는 곳이다. 왕이 사는 곳 왕궁도 봤는데 어느 나라에게 점령을 당해 그 곳에는 아직도 그 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킬링필드는 한 때 하루에 2만명씩 죽였고 내 나이 16살 정도의 아이들이 죽었다고 한다. 폴 포트라는 사람이 1년동안 무려 200만명 즉 인구의 3분의 1을 죽였다고 한다. 기념관에는 고문도구와 실제 죽기 직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니 정말 가슴이 아파왔다. 그리고 그것을 다보고 나오면 구걸하는 분들이 대부분이 팔과 다리가 없다. 아마도 지뢰 피해군인들인 것 같아서 정말 슬프다.

2주간 공정여행을 생각하면 똑바로 실현된 것 같다. 그 이유는 샴푸를 쓰지 않고 물로 아끼는 것이었지만, 우리들을 그것을 잘 극복한 것 같다. 그리고 영상편지를 배달하는 것은 그 나라의 주민들의 마음과 생활을 알 수 있고, 관광은 문화와 유적지를 둘러보며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해외 생활을 하면서 나는 인도네시아어와 캄보디아어를 한마디를 몰랐다. 하지만 짧은 영어 실력으로 겨우 화장실, 밥 등을 말했지만 영어의 중요성을 알고 더욱 영어 공부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그 사람들이 못 산다고 인격을 무시하는 짓을 절대 하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우리는 같은 사람이고 그 사람들과 우리는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잘 대해줘야 한다. 그래서 방문한 가정 중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집이 바로 김다라씨의 집이었다. 왜냐하면 가장 열악하고 정글에서 살다시피 하신다. 그 집은 마음만큼은 진수성찬으로 주시고 싶을 테지만 줄 수 있는 건 덜 익은 바나나 2송이 뿐이다. 그래도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또 먹었다.


여행하는 기간 중에 불편했던 점은 장시간 차를 탐으로 몸에 피로가 쌓여서 스케줄을 소화하지 못하고, 물이 부족한 국가는 씻을 수가 없는 불편함에 힘이 들었다. 그 반면 인상 깊었던 점은 영상을 배달하며 방문한 각 가족들의 환한 미소와 고마움이 가장 인상이 깊었다. 그리고 구걸하는 사람에게 돌을 준 점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무심코 장난삼아 준 돌이 나라의 명예를 깎아먹고 우리의 부모님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는 것을 배우고 반성한다. 

여행학교의 적당한 기간은 2주가 좋은 것 같다. 하나의 나라를 다니면 그 나라의 전통만 배우고 다른 나라는 모르지만 2개국을 간다면 각 나라의 차이점 그리고 음식, 문화, 생각을 느낄 수 있다. 기간이 2주인 이유는 일주일 만에 그 나라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힘드므로 2개의 국가를 1주 단위로 끊어 다녀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세계로 여행학교는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는 행복의 배달부' 라고도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멀리 있는 가족을 보고 싶은 사람과 그 그리움을 전달하였기에 모두 행복해 지기 때문이다. 계속 영상편지를 배달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의 그리움과 사랑을 배우고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배우며 편지를 배달하는 뿌듯함을 느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꿈은 요리사였지만, 이 여행을 통해 작은 나라 한국에서는 내 큰 꿈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이 여행을 발판을 삼아 내 꿈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제1기 세계로 여행학교
                                                                                                       박성호 (사천중 3)